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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고분군 중의 하나로 풀이 무성하다.
집안 고분군 중의 하나로 풀이 무성하다. ⓒ 정윤섭

화려한 고구려 고분벽화

집안은 길림성 남부에 있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집안은 본래 통구(通溝)라고 불리었는데 1965년부터 집안현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기원 후 3년부터 427년(장수왕 15)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있는 유적들은 대부분이 고구려와 관련된 것으로 산성 등의 유적이 8개소, 30개소의 고분군에 1만3000여기에 이르는 고구려 최대의 무덤들이 있어 그야말로 고구려 역사의 산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 중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이 고분벽화로 대개 4세기 말에서 6세기 사이에 축조된 봉토석실분(封土石室墳)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벽화에는 고구려의 사회생활, 문화의식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집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태왕릉(太王陵), 장군총(將軍塚)등의 적석총과 벽화무덤인 삼실총(三室塚), 무용총 등의 무덤이 있다.

집안박물관 앞에 전시된 초석
집안박물관 앞에 전시된 초석 ⓒ 정윤섭
집안의 시내에는 박물관이 있다. 1958년 개관하여 건평 200평 가량인 비교적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다. 그러나 그 규모에 맞지 않게 당시의 화려한 고구려의 문화재들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어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다.

박물관은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이 3관으로 나누어져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는 고구려 역대왕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데 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부족장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이곳의 중앙 로비에는 광개토왕비의 탁본이 넓게 펼쳐져 있어 그 규모에 위압감마저 느껴지게 한다. 1관에는 고구려 고분과 성에 관련된 자료실, 2관은 광개토왕비문 자료실, 3관은고구려 유물자료실로 나누어져 있으며, 금동신발을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무기, 마구와 토기 등 많은 전시물들이 당시의 역사를 되살아나게 만든다.

고구려의 고분을 찾아갈 때 대체로 가장 먼저 가는 곳이 5호분이다. 고구려 벽화가 발견된 곳은 5호분 일대로 지금은 들어갈 수 없지만 전시관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벽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해놓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지만 당시의 화려한 고구려의 번성했던 문화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고분벽화의 모습은 이제 우리들도 쉽게 접하게 되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러한 고구려벽화의 모습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도 고분벽화의 보존을 위해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들어갈 수 있어 그 현장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장군총 하단부의 자연석은 팽창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놓은 것이다.
장군총 하단부의 자연석은 팽창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놓은 것이다. ⓒ 정윤섭

집안에서 고구려 문화를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장군총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무덤들이 인근에 흩어져 있다. 잘 다듬은 돌을 외벽에 쌓아 올려 마치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이 무덤은 그 외형의 규모만큼은 당시 석조문화의 우수성을 느끼게 하여 보는 이를 앞도 한다.

집안시 인근에는 채석장이라는 유적이 있는데 장군총은 채석장에서 돌을 운반하여 쌓았다고 하며 운반을 할 때는 겨울에 땅이 얼 때 얼음의 미끄럼을 이용하여 운반했다고 한다. 마치 고인돌을 운반하듯 겨울의 혹한 속에서 돌들을 운반해 장군총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당시 그것을 축조한 세력들의 고난도 느껴지지만 고구려의 힘 또한 느껴진다.

장군총은 하단부에 거대한 자연석을 빙 둘러 막아놓고 있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데 이 자연석은 돌의 하중에 의해 밖으로 팽창하여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도 이러한 힘의 원리를 깨닫고 미리 방비를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장군총 옆의 노출된 고분석
장군총 옆의 노출된 고분석 ⓒ 정윤섭
광개토왕릉에서 100m 가량 떨어져 있는 것이 유명한 광개토대왕비이다. 주변은 아직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 우거진 풀밭으로 되어 있고 이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유리에 쌓여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비를 만날 수 있다.

어찌 보면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와 고구려 역사의 핵심이 이곳 비문에 담겨있다 할 수 있다. 우선 단일 비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규모에 놀란다. 중국 정부에서 비의 보호를 위해 유리관을 씌웠다고 하여 직접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오래 전의 역사가 살아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것 같다.

유리벽 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유리벽 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 정윤섭

중국의 개혁개방

중국여행을 하면서 허름하고 비좁은 주택과 함께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화장실 문제다. 호텔과 같은 곳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시골이나 기타 공공장소에서 화장실에 가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지금은 그래도 낳지만 칸막이가 없는 곳에서 일을 보거나 심한 악취 때문에 화장실 가기가 두려운 것이다. 이러한 화장실 문제는 국가에서 주어진 공공주택으로 인해 개별적인 화장실보다 공동화장실을 써야하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라고도 한다.

그러나 중국은 지금 경제적으로 개혁개방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으로 전환한 이래 다시 깨어난 거대한 공룡(괴물)이 돼가고 있는 것이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의 어느 곳을 가나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비교적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이곳 동북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의 현재 인구가 약 13억 정도라고 하며 이 어머어마한 인구가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이다. 그런데 이 중국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마 벌써 오래전에 혁명이 일어났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중국은 현재 이 인구를 먹여 살리고 개혁개방을 성공시켜 나가고 있다. 어찌 보면 참 기적 같은 일이다.

이 먹는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덩샤오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덩샤오핑이 말했던 흑묘백묘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 마오쩌둥이 집권하기 이전 중국은 지주가 90%의 토지를 소유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이 토지를 환수하여 나주어 주게 된다. 이때 생겨난 것이 집단농장으로 집단농장은 사회주의 경제의 독특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생산력의 저하로 인한 노동생산성 문제 때문에 중국은 덩샤오핑이 집권한 후 사실상 집단농장을 폐지시킨 바 있다.

현재 중국은 아직도 토지는 국가 소유이지만 국가로부터 싸게 누구나 장기임대를 통해 얼마든지 농사를 짓거나 투자를 할 수 있다. 주택에 대해서도 소유를 허락하고 있어 사실 중국은 토지소유만 허용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나 다를 바 없게 된다. 아직도 집단농장을 실시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북한에 비해 생산성 향상을 위해 집단농장을 폐지하고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경제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는 중국의 오늘의 모습이 새삼 비교된다.

집안은 고구려 제2의 수도이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었던 만큼 산성국가였던 고구려의 성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국내성은 집안 시내에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가 유리왕 22년에 도읍을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것으로 이곳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때까지 도읍이 된다. 이 국내성은 압록강가의 통구분지의 서쪽에 차지하고 있다.

집안 압록강변의 유원지
집안 압록강변의 유원지 ⓒ 정윤섭

성의 동쪽 6km지점에 용산(龍山), 북쪽 1km지점이 우산(禹山), 그리고 서쪽 1.5km지점이 칠성산(七星山)의 뒷면과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앞쪽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있어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천연요새라고 할 수 있다. 국내성은 집안 시내 한가운데에 일부가 남아있었는데 성벽 주변에 집들이 가득 들어서 있었으나 중국 정부에서 정비를 하면서 많이 철거된 상태라고 한다.

또한 부근에 환도산성이 있는데 강을 이용해 협곡의 넓은 분지에 자리 잡고 있는 산성이 요새처럼 들어서 있다. 이곳 바로 환도산성 아래에는 당시 왕들과 수장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천개의 무덤들이 떼를 지어있는 '무덤떼' 고분군이 있다. 거대한 무덤들이 떼를 지어 다시 산을 이루고 있는 모습에서 고구려의 환영이 다시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압록강변에서

집안은 북한과의 접경도시로 바로 압록강 건너가 북한땅이다. 집안시의 남쪽 강가에는 위락시설로 고속보트를 타고 쉴 수 있는 일종의 유원지가 있다. 이곳에는 압록강이라는 큰 표지석이 서있고 중국의 오성기가 펄럭이고 있다.

압록강변에서 바라본 북한땅. 높은 산까지 옥수수가 심겨 있다.
압록강변에서 바라본 북한땅. 높은 산까지 옥수수가 심겨 있다. ⓒ 정윤섭

강 너머로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수영을 해서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이곳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면 그 민족감정 때문인지 왠지 자꾸 숙연해지고 생각을 더하면 눈물이 핑 돌려고 한다. 이렇게 아주 멀리까지 와서야 분단된 조국의 북쪽 땅을 관광객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마음, 그것도 옛 고구려의 화려한 영화의 현장에서 분단된 한쪽의 땅을 바라보아야 하는 마음이라니.

저 건너가 현재의 북한 땅이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해주는 듯 나무 하나 없이 민둥산이 된 북한 땅을 바라보면 서글픔이 앞선다. 그 민둥산은 자세히 보면 수백고지의 산에도 옥수수가 심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어 식량난의 심각성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중국의 압록강변은 휴식 레저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집안시의 시민 휴식공간 같은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평일임에도 강가에 나와 보트를 타며 즐기고 있었다. 압록강변에서 보트를 타면 고속 모터보트가 시원한 강바람을 가른다. 보트는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북한쪽의 강변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강가로 난 도로변으로 가끔씩 오가는 북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무표정한 사람들의 모습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집안에서 본 압록강변
집안에서 본 압록강변 ⓒ 정윤섭

이곳 압록강변의 인근 식당은 한글간판이 수없이 붙은 불고기식당이 즐비하다. 대부분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이 식당들은 한여름에도 성업을 이루고 있었다. 상추쌈에 쇠고기를 숯불을 이용, 적쇄에 구워 먹는 것으로 상치, 고추, 마늘과 싸먹는 방식은 삼겹살을 싸먹는 우리와 흡사하다. 원래 중국인들은 불고기 요리를 잘 먹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국의 이 불고기 요리를 즐겨 먹는다고 하며 이 때문에 장사도 잘된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지난해 6월 중순부터 일주일간의 일정으로 옛 고구려 역사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는 환인과 집안 등지를 비롯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조선족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길 지역을 방문하였다. 동북공정에 대한 논란이 벌써 1년이 지난 시점에 그때를 생각해 보고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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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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