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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수한 햇빛의 진동이 바람을 몰고 온다. 바람에는 거역하지 못하고 풀잎들은 쓰러진다. 풀잎이 쓰러지며 내는 스산한 소리가 가을을 닮아 있다.
은빛 풀잎 사이사이에 흰마타리꽃들이 드문드문 피어 있다. 그러나 환하게 펼친 그 별꽃들의 무리는 색깔을 잃고 누렇게 때론 갈색으로 주먹을 꼭 쥔 채 벌써 가을 주위로 뭉치고 있다.
여름 지나 가을이 더 깊어지고 마침내 겨울비가 내리면 그 주먹이 펴지리라. 그 펴진 주먹에서 꽃씨 한 움큼씩 땅에 떨어지고 더러는 바람에 날려 가리라.
풀밭이 끝나는 곳에서 성급하게 피어 올린 갈꽃을 만난다. 은빛 도는 갈색의 머리카락이 가을 쪽으로 흩날리고 있다. 그 머리카락 너머 보이는 바다에 물이 가득 차 있다. 밀물이다. 그 푸른 바닷물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맹그로브 숲이 지금쯤 분주하리라.
그러나 막상 해안 절벽길을 내려가 바닷물 위에 놓은 나무 트랙을 걸어 가보면 고요하다. 비어 있는 나무 벤치에 반사되는 햇빛조차도 이곳에서는 바람을 불러 모으지 못한다.
여기서 잠시 쉬기로 한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매미 소리가 비로소 들린다.
2. 숲
숲길로 들어선다. 바닷가에 있는 숲이지만 워낙 울창해서 바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나뭇잎뿐만 아니라 밀림을 연상시킬 정도로 어지럽게 자라고 있는 덩굴식물들이 빛을 가리고 있다.
숲은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한 그늘이다. 초원을 건너오느라 목덜미에 끈적끈적하게 흐르던 땀이 바로 식는다.
구불구불 그리고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숲길을 키 큰 나무들이 앞장서서 걷는다. 그 사이사이에 펀 트리(Fern Tree)라고 불리는 고사리 나무가 우산살처럼 넓은 이파리를 펼치고 호위하듯 서 있다.
아내는 나물이라도 무쳐먹을까 하며, 그 아래에서 어린 고사리들을 찾아보지만 찾지 못한다.
어린것들은 오히려 옆으로 누워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어느 나무의 등에서 발견된다. 어미의 등을 밟고서 수직으로 자라고 있는 기다린 지팡이 모양의 어린 가지들에는 싱싱한 녹색의 잎들이 달려 있다. 어미는 그 싱싱한 녹색의 잎들이 분명 자랑스러우리라.
어미의 이 자랑스러움을 보이지 않는 줄기의 끝 어디쯤에서 매미들이 대신 전해준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어대는 매미의 노래를 들으며 한여름이 정오를 막 지나고 있다.
3. 해변
막 정오를 지난 시간, 우리는 바닷가에 닿는다. 바닷가는 비어 있고 잔잔한 바다에 떠 있는 몇 척 요트가 우리를 맞이한다. 몇 척은 바다 쪽으로, 또 몇 척은 내륙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내 그리움은 어느 쪽으로 향해 있을까.
작은 조개껍질들이 가득 깔려 있고 나무 그늘이 있는 곳에 우리는 돗자리를 깔고 앉는다. 바다 위에 뜬 배들과 흰 구름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잠시 침묵을 즐긴다.
마침내 아내가 묻는다. 여기 와서 사니까 좋지? 그리고 그 물음표 끝에 추신처럼 두 개의 영어 단어를 덧붙인다. 'with me.' 나는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내도 웃는다.
작은 조개껍질 같은 하얀 이빨이 빛난다. 가슴 쿵쾅거리며 이빨을 서로 부딪치며 나누었던 첫 키스의 추억처럼. 그 빛나는 추억들이 여기 이렇게 쌓여있구나. 하얗고 작은 조개껍질들에 새겨진 그 물결무늬들을 나는 손으로 더듬어본다.
그렇게 한 시간을 보내고 아내가 아침에 부지런히 준비해 싸온 김밥 도시락을 꺼내 먹는다. 냄새를 맡았는지 갈매기 한 마리가 멀리서 우리 쪽을 빤히 바라보면서 몇 번 목청을 돋운다.
그러면서도 감히 우리에게 다가서지는 못한다. 그래, 우리가 인간이구나. 인간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살아남는 법이지.
돌아오는 길, 썰물로 물이 빠져나간 갯벌에 혼자 정박해 있는 요트 한 척을 만난다. 닻을 내리고 있는 한, 밀물이 되어도 저 배는 꼼짝하지 못하리라. 닻이 돛이 되는 날, 저 배는 비로소 덫을 벗어나리라. 내 삶도 그러하기를 꿈꾼다.
덧붙이는 글 | '2005 이 여름을 시원하게' 기사 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