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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자화상
모네의 자화상 ⓒ 모네
인상주의라는 용어도 모네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어느 신문기자(루이 르로이)가 그의 첫 번째 전시회에서 작품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를 본 후, 느꼈던 시각적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제목을 따라 '인상주의'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 계기가 되어 모네를 중심으로한 화가집단에 붙여졌습니다. 당시의 의미는 부정적이었으나, 모네는 그 후에도 빛을 사랑하고 동경하여 희뿌연 아침 안개와 빛으로 물드는 일출의 바다, 은비늘처럼 빛에 반짝이는 포플러나무, 정원 연못의 수련 등, 사물 본래의 특징보다는 빛에 의해 변화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연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모네는 1840년, 파리의 류라피테(rue Laffitte)에서 태어났고, 소년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부댕을 만나, 외광(外光)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습니다. 19 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학업하였으며, 2년간 병역을 치르고 1862년 파리로 귀환, 글레르 밑에서 A. 르누아르, A. 시슬레, F.바질 등과 사귀며 공부하였습니다. 초기에는 G. 쿠르베와 E. 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게 됩니다.

1870~1871년에 런던에 머물렀으며 그 이후에는 파리 북부 아르장퇴유와 베퇴유에서 살았다. 1883년에 고향인 노르망디의 지베르니 쉬르엡트에 정착했으며, 오늘 소개하는 아래의 그림들도 그의 아내 카미유(Camille), 아들 장(Jean)과 함께 이 시기에 빛을 찾아 산책하며 그린 작품들입니다. 모네는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경우가 잦았으며, 그가 유명해진 것은 1889년 조르주 프티 화랑에서 열린 로댕과의 2인전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렇게 빛을 찾아다녀서인지 만년에는 눈병을 앓다가 1926년 86세의 나이로 지르베니(Geverny)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빛에 따라 밝은 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는데,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배열'을 이용하고 있으며, 이는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한 것입니다. 자연을 감싸고 있는 대기의 미묘함이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인 분위기와 느낌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作畵)의도는 동일한 제제를 아침, 낮, 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작품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연작 풍경도 준비 중에 있으므로 많은 기대바랍니다.

아르장퇴유, 모네의 정원 (Monet"s Garden at Argenteuil, 1873,  Oil on canvas, 61 x 82 cm; Private collection)
아르장퇴유, 모네의 정원 (Monet"s Garden at Argenteuil, 1873, Oil on canvas, 61 x 82 cm; Private collection) ⓒ 모네

지르베니의 건초가리(Haystack at Giverny, 1886, Oil on canvas, 60.5 x 81.5 cm State Museum of New Western Art, Moscow)
지르베니의 건초가리(Haystack at Giverny, 1886, Oil on canvas, 60.5 x 81.5 cm State Museum of New Western Art, Moscow) ⓒ 모네

지르베니, 모네의 정원 (Monet"s Garden at Giverny, 1895, Oil on canvas, 81.5 x 92 cm)
지르베니, 모네의 정원 (Monet"s Garden at Giverny, 1895, Oil on canvas, 81.5 x 92 cm) ⓒ 모네
인상주의자들은 마네의 뜻을 좇아 화구통을 들고 화실 밖으로 나온 화가들로, 자신의 눈을 통해 직접 본 것이 아니면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모네였습니다. 자연에서 실제로 관찰된 현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며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모네는 순간적으로 관찰된 대상을 포착하기 위하여 재빨리 붓을 휘둘러 그림을 완성해야만 했고, 과거의 화가들처럼 꼼꼼하게 마무리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화면에 거친 붓자국을 남기게 되었으며, 세부보다는 전체적인 느낌과 분위기, 빛의 효과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위의 첫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하나의 세세한 표현을 생략하고 구름의 묘사도 가까이 있는 것과 먼 것에만 빛의 명암을 이용하여 인상적인 느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건초가리와 꽃 풍경도 그렇고, 셋째 그림 역시 마찬가지로 꽃 하나하나의 느낌과 생김새보다는 화폭 전체에 흐르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정감을 색조 분할과 원색 배열 기법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네의 생전에 열과 성을 다해 꾸며놓은 화단과 연못은 모네의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작품이며,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화가들이 유품으로 그림을 남겼지만, 모네의 이 정원만큼 크고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모네도 생전에 이 정원을 자랑하느라, 많은 사람들을 일부러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고 합니다. "이곳 전원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여기 와서 이 정원을 구경하라고 편지에 쓰고 싶었답니다. 정원은 지금이 한창 때이니, 한 번 와볼 만할 겁니다. 보름 정도만 지나면 다 시들어 버릴 거예요" 1900년 5월, 모네가 귀스타브 젤프루아에게 쓴 편지글인데, 그가 얼마나 이 정원에 애착을 갖고 조성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르장퇴유 근처, 개양귀비 꽃 (Coquelicots (Poppies, Near Argenteuil), 1873, Musee d"Orsay, Paris)
아르장퇴유 근처, 개양귀비 꽃 (Coquelicots (Poppies, Near Argenteuil), 1873, Musee d"Orsay, Paris) ⓒ 모네

양산을 들고 있는 여인 카미유와 아들 장과 산책하기(he Stroll, Camille Monet and Her Son Jean (Woman with a Parasol), 1875, Oil on canvas, 100 x 81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양산을 들고 있는 여인 카미유와 아들 장과 산책하기(he Stroll, Camille Monet and Her Son Jean (Woman with a Parasol), 1875, Oil on canvas, 100 x 81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 모네
모네의 작품 속에는 찬란한 빛과 풍부한 색채가 살아 숨쉽니다. 그는 순간적인 이미지를 포착해내고 그 자연의 떨림을 재현해내기 위해 그에 어울리는 채색방법을 터득해 나갔는데, 위 그림처럼 거칠고 강한 붓터치와 극심한 색조의 굴곡을 보여줌으로써 독자(관객) 마치 현장에서 바람을 맞고 햇빛을 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한 번 보고나면, 잊을 수 없게 만들며, 다시 기억하게 만듭니다.

이 두 그림 속의 주인공은 아들 장과 아내 카미유입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청순해 보이는데, 아래 그림을 그린 4년 뒤인 1879년 9월 5일, 모네는 아내 카미유를 저 세상으로 떠나 보냈습니다. 그 날 그가 한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 "마지막으로 아내의 목에 걸어주게 저당잡힌 아내의 목걸이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어려운 시절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비통함과 쓸쓸함이 느껴져 옵니다.

두 그림 모두에서 보이며, 다른 모네의 그림에서도 이 둘은 종종 그림에 활력과 시선을 잡아주는 중심인물로 등장합니다. 장의 모습도 매우 천진하며 호기심 많은 표정이어서 종종 아버지와 산책하며 그림 그리는 곳마다 따라다녔음을 짐작케 하며, 모네가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며 빛의 오묘함을 화면에 담아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순간, 모네의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하면서 그가 생전에 이 정원을 가꾸기 위해 어떤 마음과 기대로 설계하고 준비했으며, 꽃과 나무를 심고 정성을 들였을지 충분히 상상이 됩니다.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풀빛이 달라지면 장과 카미유에게 자랑도 했을 것이며, 하나하나 설명을 붙여가며 그림도 그렸을 모네의 행복과 즐거운 표정이 눈에 선하며, 마음에까지 전해져 옵니다. 모네의 정원을 산책하고 머물며 마음의 시름까지도 모네가 보낸 바람에 실려 맑게 씻어진 듯합니다.

'인상주의'란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근대 예술운동의 한 갈래이며, 미술에서 시작하여 음악, 문학 분야에까지 퍼져나갔다.

인상주의미술은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거부하고 색채, 색조, 질감 자체에 관심을 둔다. 인상주의를 추구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하였다.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는 모네, 마네, 피사로, 르누아르, 드가, 세잔, 고갱, 고흐 등을 들 수 있다.

<풀밭 위의 식사>를 비롯하여, 1863년 낙선자전에 출품한 <풀밭위의 점심>과 1865년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마네를 중심으로 한 청년화가들이 카페 게르보아(Cafe Guerbois)에서 모여 새로운 회화에 대한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인상파 활동이 탄생되었다.

1874년 봄 나다르 사진관에서 첫 전람회인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 제1회전을 열었는데, 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라는 풍경화의 제명을 따서 루이 르로이라는 미술기자가 '인상파 전람회'라고 다분히 조롱 섞인 기사를 실은 것이 '인상파' 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인상주의 미술과 상징주의 시 등에 영향을 받아 나타난 인상주의 음악은 극도로 절제한 표현의 섬세함과 자극적·색채적인 음의 효과, 모호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인상주의 작곡가로는 드뷔시를 꼽을 수 있으며, 라벨·스트라빈스키·바르토크·코다이·레스피기·델리어스 등의 작곡가도 일시적이지만 인상주의 양식을 채용하였다.

덧붙이는 글 | 모네의 그림과 약력, 그림의 설명, 그리고 인상주의는 브리태니커사전과 두산백과사전, Claud Monet Life and Art(http://www.intermonet.com), Monet Cyber Gallery(http://www.monet.pe.kr)의 도움을 받았으며, 번역한 내용에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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