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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 녹취록 13권. 이 불법 도청물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 삼성이다. 상황은 그렇게 아이러니하게 흘러가고 있다.

불법 도청물을 압수한 시점은 지난달 27일, 그로부터 5일이 지나는 동안 검찰발 기사는 춤을 췄다. 검찰이 공개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는 보도에서부터 일부 내용에 한정해 공개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그러다가 오늘자 <동아일보>는 김종빈 검찰총장과 정상명 대검차장 등이 불법 도청물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도청 내용을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보지도 않겠다는 뜻이 강하게 담긴 메시지다.

검찰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긴 쉽지 않다. 일각에선 검찰의 수사 의지를 지적하지만 핀트가 잘못 맞춰져 있다. 검찰은 정부 기관이다. 정부 기관은 법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게 법치주의다. 핵심은 의지가 아니라 권한이다. 검찰에겐 불법 도청 내용을 전면 공개할 법적 권한이 없다. 이게 현실이다.

우회로를 검토할 수는 있을 것이다. 불법 도청 내용 중 범법 사실을 선별해 공개하고 사법처리하는 방법은 법치주의를 어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모색해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여의치가 않다. 불법 도청 행위가 종료된 시점은 97년 말 또는 98년 초이다. 따라서 불법 도청물에 담겼을 불법 행위 시점은 그 이전이다. 반면에 불법정치자금 수수는 공소시효가 3년이다. 불법 도감청은 7년이다. 두 죄목을 걸어 불법 도청 내용을 공개하려고 해도 거의 대부분이 빠져나간다.

검찰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죄목은 공소시효 10년의 뇌물 수수 행위다. 검찰이 설령 불법도청 내용 중 뇌물 수수행위를 가려 사법처리에 들어간다 해도 그 대상은 96년 후반기 이후의 행위로 제한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형평성의 문제다. 어쩔 수 없이 선별을 하게 될텐데 선별 결과가 특정 정파, 특정 재벌에게만 집중될 경우 검찰 수사의 공정성 시비가 붙을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가상의 경우는 일단 제쳐두자. 당장 제기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바로 삼성이다. 검찰이 불법 도청물 수사를 덮을 경우 삼성은 호재를 얻는다. “왜 우리만”이라는 말이 당장 튀어나올 수 있다.

게다가 언론은 박인회 공운영씨의 삼성 접촉 시도를 대서특필하면서 그 불법성과 의도성을 집중 부각해놓은 상태다.

삼성이 피해자로 묘사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다른 재벌의 불법행위가 담겼을 개연성이 큰 불법 도청물을 그대로 덮을 경우 삼성이 뭐라고 하겠는가. 삼성 표적론이 나올 가능성은 개연성 범주에서 필연성 범주로 올라간다.

불법 도청물은 분명 뜨거운 감자다. 먹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열을 식히는 방법….

먹기 좋게 열을 식히는 방법은 뭘까? 이 문제와 관련해 <한겨레신문>은 ‘중립적 민간기구’에 의한 조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한겨레신문>은 전국의 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전하면서 검찰이 아닌 다른 기관이 조사를 해야 한다는 응답률이 63.5%였으며, 이같이 응답한 사람들의 41.1%가 ‘새로 만드는 중립적 민간기구’를 그 대안으로 꼽았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국민 여론은 궁극적으로 특별법 제정에 대한 요구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중립적 민간기구’가 조사 권한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법률적 뒷받침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화두는 <한겨레신문>에 의해서 던져졌다. 남은 문제는 두 가지다. 국민 여론이 이 화두를 재확인할 것인가가 그 하나고, 정치권이 국민 여론에 따를 것인가가 다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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