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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랑교회 내부
한사랑교회 내부 ⓒ 조갑환
한반도사랑교회는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4평 남짓한 곳에 탁자만 하나 놓여 있었다. 이 곳에서 새터민 몇 명이 기거를 하며 주일에는 새터민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7월 30일, 한반도사랑교회에서 새터민 세 분을 만났다. 나는 극렬하리만치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다.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 얼마나 반공교육에 세뇌되었던지 북한주민들은 머리에 도깨비뿔이 솟아 있을 정도로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괴뢰군, 공산당들은 아주 잔인하고 김일성사상교육에 세뇌되어 오로지 김일성 유일사상에만 젖어 있는 인간적인 정서면에서는 아주 부족한 사람들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새터민 세 분과 인사를 나눴다. 한 분은 C전도사로 고향은 함북 청진 부근의 농촌이며, 나이는 40정도였다. 2002년도에 이 곳에 와서 현재 신학대에 다니며 한반도사랑교회를 이끌고 있다.

이 분은 배가 고파서 탈북을 했다고 했다. 고향에서 딸과 아버지가 굶어 죽었다고 했다. 아프리카도 아닌 한반도에서 남쪽은 쌀이 남아도는 등 너무 잘 먹어서 비만으로 각종 성인병으로 걱정들인데, 한반도 북쪽은 굶어죽는 현실이라니 이 말이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북한의 군생활은 10년이라고 한다. 그도 16세에 입대를 하여 25살에 제대를 했다고 했다. 군에서는 강원도 고성남방의 최일선 철책선에 근무했다고 했다. 나도 군시절에 최전방 백암산의 철책선에 근무했다고 했더니 그가 신기한 듯 한 마디를 했다.

새터민들의 한반도사랑교회
새터민들의 한반도사랑교회 ⓒ 조갑환
"남북한의 총검을 맞댄 군인들이 이곳에서 만나니 이상하군요."

또 한 남자분은 40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함경북도 종성 출신으로 강건고등군사사관학교를 나온 엘리트라고 C씨가 소개를 했다. 그는 북한에서 결혼을 해서 애들도 있지만 아내와 애들을 놔두고 혼자 내려와서 이 곳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또 한 명의 40대 초반 여자분이 있었는데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이며 다행히 남편과 아이와 같이 탈북을 해서 중국에 살다가 이 곳에 왔다고 했다.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당에서 내가 소갈비를 주문하려고 했더니 이들은 한사코 다른 걸로 먹자고 했다. 북한에서 소는 거의 사람과 동격의 대우를 받는단다. 농기계가 없어 모든 노동력을 소가 해결하기 때문에 소를 아주 귀하게 여기며, 소를 잡아먹으면 사형에 처할 정도란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는 여자분이 주로 말했다. 고향이 회령이라고 하길래 내가 회령하면 참외가 유명하고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고향이며 회령 옆의 유선이라는 곳에서 탈북자들을 직결 심판하는 동영상을 보았다고 했더니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감탄을 했다.

회령에 참외가 유명하다는 것은 소설가 이효석의 수필에 회령참외란 글이 있다. 지난날에는 참외가 유명했다는데 지금은 심지 않는다고 했다. 김정숙의 생가터에 김정숙기념관이 있는데 자신은 김정숙 기념관의 여성 안내원이었단다.

새터민 세분과의 만남
새터민 세분과의 만남 ⓒ 조갑환
옆에서 C씨가 여자분은 북한에 애들 두 명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하고 싶지 않은 듯이 말을 꺼냈다. 어디 가서 북한에 애들을 두고 나왔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어쩌면 애들을 두고 나올 수가 있을까 하며 자신들을 냉혈한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녀는 당초 탈북하여 중국에 살았는데 이곳 남한사회보다 중국이 훨씬 살기가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적 없이 산다는 것이 불편하고 공안들의 불심검문들이 두려워 남한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듯이 피곤해 보였다.

북한에서 데려온 딸은 13살인데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이란다. 그러나 아이가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제 또래가 아닌 동생들과 학교를 다니며 갈수록 말이 없어져 걱정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새터민들의 말을 들으면서 무슨 업보를 졌길래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계속 비극만을 주실까 하는 마음에 막연히 하나님을 원망해 보았다. 우리가 2차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도 아니면서, 둘로 나뉘어져 이렇게 긴 60년 분단의 역사를 가져야 하는지. 우리 대신 일본이 나뉘어 졌어야 했다.

6·25로 생긴 이산의 아픔은 그것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탈북으로 인한 또 하나의 이산의 비극들이 야기 되고 있다. 분단된 현실에서 이산의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실로 당해보지 않은 우리들은 쉽게 말하지만 자식을 두고 온 부모의 찢어지는 가슴을 누가 이해하랴.

새터민들은 정부나 사회단체에서 자신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은 외국인이 아닌 우리 민족이다. 몇 시간 대화를 해보니 그들은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었다. 정서가 같고 말이 통하니 금방 친해졌다.

국내에 새터민들이 6000명이 와 있다고 했다. C전도사도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서 아무것도 모르고 김일성 종교에 세뇌되어 있는 북한인민들을 정신적인 무지에서 구제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통일이 멀지 않은 듯 싶었다.

우리 정부, 국민 모두가 새터민들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남한 사회에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들을 통해서 통일 이후의 문제점들을 도출하고 해결 방안을 강구한다면 통일 이후에 독일 통일과 같은 여러 갈등 및 문제점들을 훨씬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남북이 정신적으로 진정 하나가 되는 기간도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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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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