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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턴의 드 몰렌 풍차와 작별한 우리는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Wellington)까지 쭉 이어지는 1번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린다. 좀처럼 눈에 띄지 않던 태즈만 해가 오타키(Otaki)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멀리 시야에 잡히기 시작한다. 카피티 해안(Kapiti Coast)에 들어섰다는 얘기다.

태즈만 해를 가슴에 품으며 약 40km에 걸쳐 굴곡 없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카피티 해안은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해변들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에 대도시인 웰링턴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더해져서 여름철마다 휴가를 즐기려고 온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곳을 찾은 시기는 한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던 때라, 해변도 도로도 모두 한산했다. 중간에 파라파라우무(Paraparaumu)라는 마을 근처에 있는 남반구 최대 규모의 구식 자동차 박물관 '사우스워드 자동차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서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흥미로운 이 자동차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는 뉴질랜드 여행기(2) : '장난감 트랙터는 죽고 오래된 벤츠는 살아남다'를 참고하세요).

'초록 잉꼬의 횃대'에서 바라본 저녁 노을

오후 5시가 조금 지난 시간, 기울어져 가는 늦은 오후의 가을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카피티 해안의 남쪽 끝 마을에 도착한다. 그 마을 이름이 재미있다. 파에카카리키(Paekakariki), 이곳 원주민 마오리 말로 '초록 잉꼬(kakariki)의 횃대(pae)' 라는 뜻이라고 한다. 왜 이런 마을 이름이 붙여졌을까?

그러나 그 궁금증을 금세 잊어버리고 우리는 마을 끝 갈림길에서 1번 고속도로를 버리고 바닷가의 가파른 고개로 이어지는 좁은 도로(파에카카리키 힐 로드)로 들어선다. 그 고개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전망대가 우리의 목적지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피티 해안의 모습
ⓒ 정철용
전망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서니 걸음을 옮겨놓기도 힘들 정도로 거센 바닷바람이 우리를 막아선다. 귀가 윙윙 울린다. 그러나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너른 바다에는 바람이 자는지 큰 파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잔잔한 물결이 둥글고 완만하게 뻗어있는 해변에 스며들고 있다. 과연 여름철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그만인 해변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의 해변이 이처럼 잔잔한 물결을 지니게 된 것은 그 앞 바다에 떠 있는 카피티 섬 때문이다. 길이 10km, 폭 2km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이 카피티 섬이 먼 바다에서 세차게 달려오는 큰 파도들을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소문난 해변의 이름 대신에 이 작은 섬의 이름을 이 지역의 지명으로 삼은 데에는 이처럼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카피티 섬의 역할은 큰 파도를 막아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거센 바람을 피해 잠시 차 안에 들어와 이 지역 여행 안내서를 펼쳐보니, 카피티 섬은 뉴질랜드의 특산 나무들과 키위를 비롯한 희귀종 또는 멸종 위기에 처한 여러 새들의 서식처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 새들의 무리 중에는 초록 잉꼬도 있다고 한다. 아, 이 마을의 지명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구나!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피티 섬의 모습
ⓒ 정철용
그렇다면 우리가 서 있는 이 전망대야말로 '초록 잉꼬의 횃대'가 아닐런지. 나는 저 아래 카피티 섬에서 날아온 초록 잉꼬들이 이곳 전망대의 나무 울타리 위에 앉아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그시 바라다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그 잉꼬들의 횃대에 나도 몸을 기대고 두 눈 가득 밀려드는 바다를 바라다본다.

거칠 것 없는 너른 바다의 수평선 아래로 저녁 해가 막 잠기고 있다. 하늘에는 구름 몇 조각이 붉게 타오르고 바다는 비단치마를 벗어놓은 듯 큰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한 주름 몇 개만 퍼져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잔물결을 거스르며 어두워지는 하늘로 솟구치는 새 몇 마리가 보인다. 그들은 카피티 섬에 있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귀소하고 있는 중이리라.

▲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넘이
ⓒ 정철용
해가 완전히 수평선 아래로 잠기고 사위가 점점 어둑어둑해지자 우리도 전망대를 내려와 저녁을 먹고 예약해 놓은 숙소인 '킬라라 B&B'로 귀소했다. 바람은 여기서도 심하게 불고 있었다. 우리는 따뜻한 방안의 침대 안에서 그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B&B는 숙박(bed)과 아침 식사(Breakfast)를 제공하는 민박의 일종으로, 뉴질랜드의 다양한 민박 형태에 대해서는 뉴질랜드 여행기 (5) : '민박이 호텔보다 좋은 이유'를 참고하세요).

바닷가 아침 산책길에 만난 갈매기 부부

다음날 새벽, 일찍 잠이 깬 나는 침대 속에서 꾸물거리는 대신 바닷가 산책에 나서기로 한다. 아내는 화장도 안 한 맨 얼굴로는 가기 싫다며 혼자 다녀오라고 한다. 옷을 꿰차고 딸아이가 자고 있는 방문을 살짝 열어보니 딸아이도 아직 한창 꿈나라다.

▲ 숙소의 이층 창문에 담긴 새벽 바다의 모습
ⓒ 정철용
커튼을 쳐 놓지 않은 창문으로 여명의 바다가 그림처럼 들어와 담겨 있다. 고요하고 아름답다. 그 여명의 바다를 놓치기 싫어서 나는 딸아이를 깨우지 않고 혼자 산책을 나서기로 한다. 이층 계단을 내려와 거실의 문을 통하여 정원으로 나서니 해변이 바로 코앞이다.

어젯밤에는 그렇게도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오늘 아침에는 거짓말처럼 바람이 그쳐 있다. 상쾌한 기분으로 나는 아직 어둑어둑한 모래밭에 내 발자국을 찍는다. 인적 없는 해변에는 잔물결이 밀려와 고운 모래밭을 핥고 있고 수평선 너머 하늘은 꿈꾸듯 발그레하게 밝아오고 있다. 그리고 새벽 하늘이 꾸는 그 꿈의 한가운데에 카피티 섬이 길게 누워있다.

▲ 잔물결이 이는 아침 바닷가
ⓒ 정철용
끊어지는 곳 없이 계속 이어지는 바닷가 모래밭을 따라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 맞은편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내 둘을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얼마쯤 걷다 보니 난파당한 모습으로 모래 위에 누워 있는 고목이 눈에 띈다.

어디서 흘러온 나무일까. 부러지고 꺾어진 가지들과 썩어 들어가고 있는 나무 기둥이 안쓰럽다. 나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하여 그 버려진 고목에 가까이 다가선다. 그러자 그 반대편에서 나무 속을 쪼고 있던 갈매기 두 마리가 갑자기 날아오른다.

▲ 모래밭에 난파당한 고목
ⓒ 정철용
나도 무척 놀랐지만 아침 일찍 먹이 구하러 나선 그들은 더 놀랐으리라. 그러나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갈매기들은 내 발걸음이 나가는 것만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설 뿐 좀처럼 하늘로는 날아오르지 않는다.

내가 조금 더 다가서자 갈매기 두 마리는 콘크리트 방파제 위로 날아가 나란히 앉는다. 그러나 서로 등을 돌리고 있다. 마치 부부 싸움하고 토라진 모양새다. 하지만 한 놈은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겠던지 고개를 돌려 자기 짝을 바라다본다. 마음 약한 그 놈은 아내일까, 아니면 남편일까.

▲ 방파제 위에 날아 앉은 갈매기 부부(?)
ⓒ 정철용
어쩌면 이 갈매기 두 마리는 부부 사이가 아닐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내 눈에는 어쩐지 그 둘이 부부 사이로만 여겨진다. 세수를 하고 화장을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문득 생각이 미친다. 딸아이도 이젠 잠자리에서 일어났을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올 걸, 하는 가벼운 후회가 인다.

나는 방파제가 있는 그쯤에서 그만 돌아가기로 한다. 온 길을 다시 되돌아 걸어가는 도중에 예쁜 조가비 두 개를 주워 호주머니에 넣는다. 그걸 만지작거리며 다시 우리의 숙소로 돌아오니 날이 완전히 밝았다. 나는 기다리고 있던 아내와 딸아이의 손바닥 위에 조가비 한 개씩을 쥐어 주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해 4월에 다녀온 뉴질랜드 북섬의 남서해안 지역의 여행기입니다. 다음 여행기는 '웰링턴에서 마주친 성과 속'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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