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 안 동궁문(東宮門)을 들어가면 먼저 숨가빴던 청말 정세의 중심에 서 있던 인수전(仁壽殿)이 보인다. 이곳은 서태후와 그녀가 옹립한 황제 광서제가 외국사신을 접견하며 정무를 살피던 곳으로 가장 먼저 문 앞에 서 있는 청동으로 만든 봉황과 용 조각이 눈에 띈다.
보통 궁궐이라면 대부분 문 쪽에 왕을 상징하는 용을, 그 옆에 왕후를 상징하는 봉황을 놓기 마련인데 이곳 이화원 그중에서도 정무를 보살피던 인수전 앞에 그 위치가 뒤바꿔져 버린 채 서 있는 모습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는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바로 이곳을 오는 관료들이나 사신들에게 청나라의 실권자는 '왕이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서태후의 과시욕이 아니었을까?
서태후와 세 황제
서태후는 중국역사상 중국을 통치했던 두 명의 여인 중 한 명이다. 비록 측천무후처럼 칭왕은 하지 못했지만 실제 그녀가 죽고 그녀의 손으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황제(부의)가 옹립된 지 3년만인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때까지 기울어져가는 청나라 역사 속에 언제나 화려하게 앞머리를 장식한 이름 석자는 늘 서태후였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녀도 자금성 안 궁녀로서의 첫출발은 매우 보잘 것 없었다.
그녀의 출신 또한 만주족 귀족가문인지 산서성의 한족가문인지 논란이 분분하지만 17살 때 궁녀로 자금성에 들어간 그녀는 뛰어난 가무솜씨로 함풍황제의 눈에 띄어 그의 유일한 아들인 동치황제를 낳아 황후 다음의 자리인 황귀비로 신분이 상승되지만 그녀의 권력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860년 영국군이 중국 침략으로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도망갔다가 병사한 함풍황제의 뒤를 이어 6살인 그녀의 아들이 동치황제에 오르게 되니 그녀는 왕의 생모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권력을 틀어쥐게 되었다.
그러나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려 하지 않으려는 것이 권력의 생리라 아들이 17살이 되어 결혼까지 해서 친정을 해야 함에도 권력을 놓지 않고 함께 수렴청정해오던 황후를 독살하고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갈라놓으며 아들과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니 홧김에 야행을 전전하던 동치황제는 매독이 걸려 후사도 없이 짧은 생을 마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는 친아들의 죽음 덕분에 자신의 친정조카를 광서황제로 옹립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굳히는 탄탄대로에 오를 수 있었다.
전리품과 같은 권력다툼
생모와의 권력다툼에서 실패한 동치황제의 죽음을 보면서 또 한번 생각나는 사람이 진시황제이다.
그 또한 처음에는 생모인 무희와 실질적인 친부인 여불위의 섭정으로 왕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왕권을 되찾아오기 위한 그의 행보는 친모인 무희를 음란하다고 별궁에 유폐시키는가 하면 친부인 여불위를 파면하고 사천지방으로 추방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끔 함으로써 통일 진나라의 권력을 틀어쥐었다. 그러고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다툼이란 혈연관계도 무시하는 패륜적이고도 잔혹한 싸움이며 과정은 생략하고 이긴 자의 결과만을 챙기는 전리품과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수전을 지나면 곤명호를 끼고 건설된 중국 정원 중에서 가장 길다는 728m의 장랑을 만난다. 그 옆의 광활한 곤명호를 비와 햇빛 등을 피하며 마음껏 볼 수 있는 구조물인 장랑의 복도 천장에는 역사적 인물이나 서유기와 같은 민담, 산수화 등 총 1만4000여 점의 채색화가 화려하게 그려져 있어 화랑(花廊)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인수전부터 시작된 나의 의문은 곤명호를 끼고 건설된 중국 정원 중에서 가장 길다는 728m의 장랑을 걸으면서도 계속되었다. 늘 이곳 장랑에서 산책을 즐겼다는 서태후는 산책을 하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모에게 있어서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의 죽음은 두고두고 가슴 속 송곳이 되어 아픔을 준다는데 권력욕으로 친아들을 몹쓸 병에 걸려 죽게 하고 조카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권력을 장악한 그녀의 마음은 이 드넓은 곤명호처럼 편안할까?
서호의 축소판 곤명호
이제나 저제나 곤명호는 말이 없지만 곤명호 주변의 한껏 늘어진 능수버들과 이 늘어진 풍광은 마치 항주 서호의 축소판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곤명호를 판 흙으로 쌓았다는 만수산 위에 지어진 불향각과 어울어진 곤명호의 풍경을 보며 마치 서호와 저 멀리 뇌봉산 위의 뇌봉탑의 풍경이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러나 실제 이화원 곤명호(昆明湖)는 항주 서호(西湖)를 교묘하게 본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호의 소제(蘇堤)와 백제(白堤)를 본따 서제(西堤)라는 이름의 제방을 만들고 지춘정(知春亭), 곽여정(廓如亭) 등의 정자를 세웠다.
곽여정에서부터 남호도(南湖島)라는 인공섬까지 연결된 17공교는 17개의 아치형 교각과 돌난간 위에 544마리의 돌사자가 조각된 총 길이 150m의 다리로 서호의 장교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서호의 장교에 비해 장식의 호화로움은 더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서호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분위기가 흡사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인이 꿈꾸는 이상적인 풍광이 바로 항주의 서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화원의 인공호수 곤명호가 아무리 시가 흘러나오는 항주 서호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흉내내고자 해도 그런 분위기를 꿈꿀 수 없는 것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서호와는 달리 급변하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 정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친아들인 동치황제의 단명으로 그녀가 옹립한 여동생의 아들 광서황제 또한 19세가 되면서 서태후와 정치적인 갈등이 깊어갔다. 광서황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사람들의 지지 하에 1898년에 '유심변법'의 실시를 통해 개혁을 하고자 했지만 103일만에 변법은 서태후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되었고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었고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광서황제는 서태후에 의해 이화원의 옥란당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말년에 그처럼 사이가 안좋은 광서황제와 서태후였지만 그들의 생은 우연히도 1908년 10월, 이틀 간격으로 사이좋게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마치 이틀 먼저 죽게 된 광서황제가 혼자 죽을 수는 없다고 원통해 하며 서태후의 영혼을 가져간 것은 아닐까?
더욱 놀랄 만한 사실은 천하를 손에 쥐고 흔든 그녀가 죽기 직전에 신하들에게 남겼다는 유언의 내용이다.
"이후로 아녀자가 정사에 간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반드시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각별히 대비해야 하오. 특히 내시가 대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명나라 말기에 내시가 전횡하였던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오."
여자로서 한 국가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였고 환관을 누구보다 우대한 그녀가 정작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행위와 정반대의 유언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에 대해 마음 한구석에 꽁꽁 숨겨둔 양심이 죽음을 앞에 두고 빗장을 풀고 나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 때문인가?
그러나 죽음을 앞둔 그녀의 참회는 별 효력이 없었던지 1928년 공산당 혁명군에 의하여 그녀의 무덤은 공개적으로 파헤쳐지고 시체는 훼손되는 등 비참한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그녀가 사랑했던 이화원은 신해혁명 후 원세개가 '황실 우대조례'를 만들어 권좌에서 쫓겨난 부의의 사유재산으로 인정해주었고 생활이 궁핍해진 부의가 1914년 이화원을 입장료를 받고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그 은밀한 자태를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었다.
서태후와의 과거를 잊은 듯한 곤명호 호수의 수면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능수버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초록의 잎을 호수에 드리우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어머니와 함께 떠난 북경여행 6번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