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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미처 잠이 덜 깬 모양인지 반쯤 처진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며 남편이 안방에서 나왔다.

“왜? 좀 더 자지. 오늘 일도 없다면서.”
“아니야. 할 일이 있어. 지금부터 내가 밖으로 나오라고 할 때까지 마당에 나오지 마. 내다보지도 말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남편이 절대로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고 한 번 더 다짐을 받더니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름대로 무슨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엉덩이가 몇 번이나 들썩거렸지만 참아 보기로 했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남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를 일으키더니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그리곤 앞이 보이지 않는 나를 이리저리 입으로 지시를 하며 마당으로 내려서게 했다. 마당으로 내려서서 아마 한 서 너 발자국 떼어 놓은 것 같았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짜자잔~~~.”

아주 잠깐. 앞이 안보였다. 남편의 손바닥에 갇혔던 내 두 눈이 잠시 적응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 같아 눈을 비볐다. 그 순간. 내 앞에 펼쳐진 놀라운 풍경에 놀라, 혹시 내 두 눈이 이상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 아닌지 싶어 죄 없는 눈을 또 한 번 비벼댔다. 그러나 그건 결코 이상 반응이 아니었다. 엄연히 내 앞에 펼쳐진 생생한 실제풍경이었다.

ⓒ 김정혜
너무 붉어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것 같은 칸나, 하염없는 기다림에 왠지 가슴을 에이는 것 같은 노란 해바라기, 금방이라도 콩이 주렁주렁 달릴 것 같은 콩잎의 초록물결. 그것을 배경삼아 근사하게 놓여져 있는 긴 테이블과 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긴 의자 두 개. 그리고 그것들 위로 햇볕을 막아 주기 위해 높이 걸려 있는 천막.

ⓒ 김정혜
이 마누라 입에서 도대체 무슨 말이 나올지 잔뜩 기대감을 품은 남편의 설레는 두 눈동자가 나를 잡아먹을 듯했다. 남편의 천진한 그 눈동자는 딸아이의 맑디맑은 까만 눈동자를 닮아 있는 듯했다. 가슴이 뜨거웠다. 이 세상 최고의 찬사를 해주고 싶었다. 저 물건들을 공짜로 얻어오기 위해 남편은 또 아쉬운 소리를 얼마나 했을는지 가히 짐작이 되었으므로.

“복희 아빠! 나 어떡해? 나 시집 너무 잘 온 것 같아.”
“그럼. 그럼. 시집 하나야 정말 잘 왔지. 세상에 이런 신랑 또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검게 그을린 얼굴에 환한 웃음을 잔뜩 머금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누라의 칭찬 한 마디에 철부지처럼 자아도취에 빠져 싱글거리는 남편이 오늘따라 어찌나 사랑스러워 보이던지.

대형할인점이나 백화점 매장의 인테리어 전기 일을 하는 남편은 가끔 이렇게 못 쓰게 된 집기들을 집으로 가져온다. 매장을 새로 꾸미면서 대부분의 집기들도 교체를 하게 되는데 그때 남편은 매장관리인에게 이런저런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양해를 구하곤 버리게 될 집기들을 공짜로 얻어 오는 것이다.

대부분이 낡고 도저히 청소가 되지 않을 만큼 지저분한 것들이다. 처음엔 괜한 쓰레기만 만든다며 못내 아까워서 가져온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를 하면서도 본의 아니게 남편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었다.

ⓒ 김정혜
우리 주방에는 예쁜 간이 테이블과 하얀 의자가 두 개 있다. 아침 시간, 그곳에서 남편과 함께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늦은 시간엔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그 테이블과 의자가 우리 부부에게 그렇게 유용하게 쓰이기 위해 내 두 팔은 그것들을 닦고 광내느라 한 사나흘쯤 몸살을 한 기억이 난다.

ⓒ 김정혜
매끼 밥상으로, 또 딸아이가 공부를 할 때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거실에 있는 낮은 탁자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난 생일날 친정어머니께서 화장대를 선물하시기 전까지 내가 화장대로 사용하던 나지막한 장이 하나 있었다. 결혼할 때 난 화장대를 사지 않았다. 화장하고는 거리가 먼, 세수하고 그저 로션 정도 찍어 바르는 나인지라 굳이 화장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반년이 지났을 때인가 싶다. 때가 꼬질꼬질하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나지막한 장을 깨끗이 손질하면 쓸 만할 것이라며 남편이 들고 들어왔었다. 밤새워 닦고 또 닦았다.

ⓒ 김정혜
어느 정도 청소가 된 장에 남편이 하얀색 시트지를 붙여 주었다. 금방 새로 사 온 것처럼 깨끗해졌다. 난 그걸 5년 가까이 화장대로 사용했었다. 지금도 그건 친정집 거실에 놓여져 있다. 어머니는 화분을 올려놓기에 아버지는 보다만 신문과 안경을 올려놓기에 안성마춤이라 하신다.

남편은 내게 말 한다. 아무리 더러운 것이라도 내 손길이 가면 반짝반짝 빛이 나니 덥석 가져오게 된다고. 하지만 나는 남편의 진짜 속내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이 마누라가 닦고 광내는 것에 진짜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못내 아까워서 덥석 가져온 게 미안해서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런 아부성(?) 발언을 하는 건지.

그러나 지금에 와선 남편의 속내가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남편이 가져온 그 낡고 지저분한 것들을 내 성격에 못 이겨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닦아댄다. 한참 후. 그것들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면 바야흐로 우리집 살림살이 하나가 더 늘게 되는 아주 큰 소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똑같았다. 자리를 잡아 놓은 긴 테이블과 긴 의자를 박박 문질러 닦고 또 닦았다. 오락가락하던 소나기가 잠시 멈추고 맑게 갠 하늘에서 밝은 햇살 한 자락이 테이블과 의자를 환하게 비출 때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 또 살림살이 하나가 느는 구나'하는 아줌마의 지극히 세속적인 만족이 내 가슴을 붕 뜨게 만들고 있었다. 바람이 서늘한 오후, 남편과 그곳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커피향 속으로 이른 가을이 묻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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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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