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유혹은 절박하다
쾌속 질주하는 리프트를 타고 시가고원의 요코떼이마 산의 정상을 올라갔다.
"쉿!"
야마모토씨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사인을 보냈다. 잠자코 있으라는 뜻? 300m를 리프트로 올라가는 동안 사방은 적막했다. 진공 상태 같다고 해야 할까. 미세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이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겨울의 소나타가 보일 뿐이다. 공자는 "겨울이 깊어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우둑함을 안다"고 했다. 아마 이러한 광경이 그 말에 꼭 맞는 표현일 듯하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좋으시겠어요. 이런 곳을 자주 올 수 있으니."
"아휴, 저희는 눈이 지겨워서 자주 오지 않아요."
솔직한 답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유난히 눈을 보지 못했던 탓일까. 겨울의 흔적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감탄을 연실 해댔던 건 오랜만의 풍경이어서 일 것이다. 산에서 시가고원으로 내려오는 길, 여전히 적막과 일탈의 유혹이 있다. 삶이 고단하고 세상이 더럽고 마음속에서 먼지가 날릴수록 산의 유혹은 더욱 절박할 것이다. 그 유혹은 흔히 하산 길에 깨어져버리는 몽환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흔적을 만나다
요코떼이마 산을 굽이굽이 내려와 시가고원의 아담한 마을에 도착했다. 다카야마촌이라는 온천 동네다. 100개 정도의 온천이 모여 있는 이 동네에는 평일이어서인지 사람이 없었다. 주말에는 아침 일찍부터 유가다(목욕 가운)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천천히 골목길을 걸었다. 우리나라 옛 가옥처럼 단순한 지붕에 홑처마, 단아한 목조집들이 대부분이었다. 검박하지만 비루하지 않음이 오히려 세련되어 보였다. 남루한 건물들은 무조건 깨부수고 전면 유리창으로 된 매트릭스 건물을 지으려고만 드는 우리나라의 최신식 건물들과 비교할 수 없는 고풍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이 건물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요."
작은 정자를 뒤로한 4층짜리 온천은 복도식으로 연결된 목조 건물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예전에 이 온천에 들렀다가 모티브를 얻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었대요."
아, 맞다. 거기서 봤다. 센이 머물면서 일했던 그 곳. 검은 혼령, 가오나시가 괴물로 변하던 그 곳. 이미 이곳은 명소가 되어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단다. 1박 2식에 20만 엔이라고 하니 저렴한 가격은 아닐지 모르나 애니메이션 속의 주인공이 된 느낌으로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아깝지 않은 시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곳에서 5분 정도 차를 타고 시가고원의 지방 술을 만든다는 다마무라 혼떼(tamamura-hoten.co.jp)에 들렀다. 103년 된 목조건물에서 210년 전통을 이어 술을 만든다는 이 곳. 5대째 가업을 물려받아 전통주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술 빚는 중년남자가 그랬다. 술은 겨울에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고. 가을에 추수한 곡식으로 술을 빚은 뒤 겨울의 온도에 보관해야 맑은 술을 만들 수 있다고. 정종은 숙성해서 마시기보다는 빚은 후 바로 먹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400년 전 전통주를 담았던 술병도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으며 차를 끓여서 대접하는 '차시쯔' 공간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15개의 술통과 5개의 증류기가 엄숙하게 자리 잡은 양조장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전통의 되 물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그 곳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숲의 시간은 느슨하다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어느덧 2시다. 온천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원숭이들이 득실거린다는 지고쿠다니 야엔코엔이 있다고 해 가보기로 했다. 공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숲 속 길을 20분쯤 걸어야 했다. 숲은 스스로 서늘하고 질퍽거리지 않아서 늘 꿈속처럼 어둑어둑하다. 이것을 몽밀(蒙密)이라고 했던가. 숲 속 나뭇잎이 연두 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니 그곳은 이미 봄이었다.
"뚫어지게 쳐다보지 마세요."
"왜요?"
"달려 들거든요. 일본에는 원숭이와 까마귀가 많은데 뚫어져라 쳐다보면 달려들어 복수해요."
완전 제 멋대로군. 저 광경을 보고 있자니 진화설이 신기해진다. <종의 기원>에 등장하는 동물들처럼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원숭이들. 원숭이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다못해 원숭이들도 그런데, 한낱 인간은 어떠랴.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온천 옆에서 이 잡고 있는 원숭이를 보며 생각했다.
꽃향기를 듣다
"시가고원에 봄이 느껴지는 곳은 없을까요?"
"있죠. 평원으로 가면 얼마든지 있죠. 가볼까요?"
야마모토씨는 차의 속력을 높여 세차게 달렸다. 1시간쯤 달렸을까. 바람이 따뜻한 걸 보니 시가고원의 서늘한 기운과는 벌써 차이가 크다. 400년 전에 생겼다는 전통 거리, 호쿠사이에 들렀다.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같은 거리인가보다. 기모노를 비롯한 아기자기한 토속품들이 즐비하다. 그 입구에는 100년은 되었음직한 강단한 벚나무 한 그루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녹차 마셔 봤어요?"
"아니요, 아직."
"그럼. 차 한 잔 하러 갈까요?"
호쿠사이가 훤히 내다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녹차, 밤 과자, 연양갱을 비롯해 식사까지 되도록 다양하게 주문했다. 이내 녹차가 제일 먼저 나왔다. 한 모금, 천천히 넘겼다. 녹차는 맨 처음 돋아낸 새순을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 햇차 맛 속에는 겨울을 견디어낸 잎의 향기가 있다는데 그런 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법경에는 '시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오랜만에 차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졌다. 한껏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한다. 야마모토씨는 마지막으로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재촉을 했다.
이틀의 달콤한 여행을 마치고 고마츠 공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물안개가 피어올라 시가고원을 이불처럼 덮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는 곳.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그 곳. 삶이 다 망가진 사람들이 산골 마을의 고향을 떠나고, 아주 할 수 없어 더 망가진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요즘, 그 곳에는 가업을 물려받아 몇 백 년의 전통을 잇고 있다.
김용택 시인의 "눈을 뜨면 풍경이 있고 눈을 감으면 풍경의 잔상이 있다"는 표현을 빌리고 싶다. 늘 있다. 가슴 속 깊은 잔상으로 남아있는 나가노는 겨울의 끝, 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