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규모와 양식이 정자라기엔 별채로 보이는 환벽당.
규모와 양식이 정자라기엔 별채로 보이는 환벽당. ⓒ 곽교신
비교적 순탄하던 정철 집안은 그가 아홉 살 적에 시집 간 누이네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며 고초를 겪는다. 유배가(流配家)의 자손이 되어 16세까지 틀잡힌 학문을 못하던 정철이 부귀와 영예를 얻게되는 기초를 쌓은 곳이 환벽당(環碧堂) 이다.

당대의 큰 학자로 역시 을사사화로 고향에 칩거하던 김윤제가 자택 별당(으로 추정되는)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 근처 개울에서 용이 노니는 꿈을 꾼다. 잠에서 깨자 바로 개울에 나가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고 그가 열 여섯 살 소년 정철이었다.

김윤제는 정철의 그릇을 알아보고 그가 과거 급제할 때까지 10여년 간 정철을 환벽당에 머물게 하며 공부시킨다. 또 그를 외손녀와 혼인시켰다. 정철은 환벽당을 드나들던 기대승(奇大升),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같은 당대 호남 사림의 대가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보너스까지 누렸다. 환벽당 용소(龍沼)에서의 목욕은 정철에겐 그야말로 제대로 뽑은 로또였다.

고등학교 때 밑줄 그어가며 지긋지긋하게 외웠던 탓에 세월이 지났어도 정철의 관동별곡 거의 전 문장을 외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문학성 특히 표현력이라는 측면에서 정철의 가사가 과연 국어 교과서에 실어 달달 외우게 만들만큼 탁월한 문장이었나 하는 점에선 의문점이 많다. 나중에 언급할 송순의 문장에서 보이는 고도의 문학적 비유나 묘사가 정철의 문장에선 약하다.

후대에 덧붙인 것으로 보이는 벽장이 균형미를 깼다. 이는 환벽당이 실용 목적으로 쓰인 건물임 짐작케한다.
후대에 덧붙인 것으로 보이는 벽장이 균형미를 깼다. 이는 환벽당이 실용 목적으로 쓰인 건물임 짐작케한다. ⓒ 곽교신
'위대한 가사'라는 송강의 문장들은 단순한 대구와 기초적 연역 및 귀납의 연속이어서 시어의 전개가 단조롭기까지 하다. 거꾸로 이 단조로움이 그의 가사를 외우기 쉽게 만들었을 것이니, 가사의 효시로 치는 고려 말 서왕가보다 훨씬 외워 읇조리기 쉬워 요즘 말로 치면 대박이 터진 것이 가사 문학 융성의 근간인지도 모르겠다.

또 그의 시가를 개인 영달을 위한 '아부성 찬가'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형은 곤장에 맞아죽고 일가는 떠돌아야 했던 어릴 적 사화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잠재의식에선지, 노골적으로 임금을 찬양한 사미인곡 속미인곡에서는 읽는 눈이 머쓱할 지경이다.

정철의 문장은 가사 문학의 금자탑이라는 업적은 이뤘으되 그의 작품들이 실제 문학적 가치 이상으로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 있음은, 송강정이 후대에 의해 깔끔하게 개비되어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던 마음과 흡사했던 것은 아닐지.

식영정

그나마 정찰 가사 문학의 향기를 살리는 곳이 식영정(息影亭)과 성산별곡(星山別曲)이다. 식영정은 정자 밑 이름도 운치있는 개울 '자미탄'(지금 이름은 '창계천')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무등산 아래 들판이 보여야 제 격이다. 그러나 정자 앞 울창한 숲이 조망을 가리고 자미탄에는 광주댐의 물이 들어차 옛 세력을 잃었다. 이래가지고는 식영정에서 성산별곡을 썼단 실감은 어거지로라도 갖기 힘들다.

정자 서쪽에서 바라 본 식영정 뒤뜰.  줄기가 여인의 살결같고 뻗은 모양도 교태스런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다. 자미탄(紫薇灘)의 '자미'는 배롱나무의 한자어. 희한하게도 배롱나무는 부인병의 특효약.
정자 서쪽에서 바라 본 식영정 뒤뜰. 줄기가 여인의 살결같고 뻗은 모양도 교태스런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다. 자미탄(紫薇灘)의 '자미'는 배롱나무의 한자어. 희한하게도 배롱나무는 부인병의 특효약. ⓒ 곽교신
원래 식영정은 사위(김성원. 金誠遠)가 근원이 바르지 못한 벼슬을 내던지고 낙향 은거하던 장인(임억령. 林億齡)에게 지어드린 의미있는 정자다. 그 정자에서 지은 가사가 성산별곡이다. 성산은 식영정의 뒷산 이름 별뫼(星山)에서 비롯한다.

정자에 오른 어떤 어르신이 건물 주위를 둘러보시며 "부엌이 안보여. 부엌이 있어야 허는디…" 하신다. "할머님, 술동이며 안주며 이고지고 하인들이 날라다주니 양반님네들은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되었어요" 하려다가 입이 방정이 될까 관뒀다.

정자를 보면 가끔이라기엔 자주 화부터 난다. 양반네들이 술, 기생, 가야금 가락을 끼고 시원한 바람을 즐기는 동안에도, 살갖을 파고 드는 뙤약볕 아래서 배불리 챙겨먹지도 못하고 논밭 일에 진이 빠졌었을 민초들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고, 그 시원한 정자를 지어주느라 땀 깨나 뺐을 민초들을 생각하면 또 화가 난다. 위대한 가사 문학이 백성들이 진땀 빼고 지어준 정자에서 탄생한 것이었음을 국어 시간에 같이 가르쳤다면 아마 화가 덜 났을 것이다.

노자암 건너보며 자미탄 겨태두고 장송(長松)을 차일사마 석경(石逕)의 안자하니 인간 유월(六月)이 여긔난 삼추(三秋)로다.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해가림막으로 삼아 돌길에 앉으니 속세의 여름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정철 <성산별곡> 중에서. 필자 역.


그래도 성산별곡은 전후(前後) 미인곡의 속이 메슥거리는 임금을 향한 아부성 문장들 보단 더위를 가시게 하는 글맛이 있다.

머뭇거리며 촬영을 부탁했던 답사객. 방문객들 성화에 이 큰 소나무 밑은 풀 자랄 새가 없다.
머뭇거리며 촬영을 부탁했던 답사객. 방문객들 성화에 이 큰 소나무 밑은 풀 자랄 새가 없다. ⓒ 곽교신
가사에 나오는 "장송"이 식영정 뒤의 큰 소나무로 보인다며 사진을 찍어가는 이가 많은데 성산별곡이 쓰여진 것이 벌써 400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베어낸 잘 생긴 춘양송(春陽松)의 나이를 꼽을 일이 있어 나이테를 헤아려보니 육십 댓 살짜리였었다. 그때 경험으로 미뤄 식영정 뒤뜰의 소나무 나이를 추정하면 80살 내외, 아무리 길게 쳐도 백 살이면 족하다. 그러나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한 나이가 무슨 대수랴. 송강 가사의 백미 성산별곡의 시적 정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식영정 뒤의 큰 소나무를 가사 속의 큰 소나무로 여겨 비스듬히 기대 사진 좀 찍어간들 누가 탓하리. 더구나 가사에서처럼 큰 소나무 밑이 시원한 돌길인 것을….

송강 정철의 흔적이 담긴 정자를 둘러보던 기자에게 막걸리와 가야금 대신 소주 몇 잔과 비틀즈의 <렛 잇 비>가 줄기차게 떠오른 것은, '생긴대로 그냥 놔둬'쯤으로 의역하면 좋을 'let it be'의 뜻이 줄기차게 연군(戀君)의 정을 그려야했던 송강 선생에 대한 안쓰러움과 대비되어서일까.

모태에서 받아 나오신 팔자 순리 대로 사시지, 왜 임금을 지아비 그리는 아낙으로까지 비약시키시고 사미인곡(思美人曲)도 모자라 속미인곡(續美人曲)까지 지으셔서는, 먼 후세에 근처 고장 어떤 국회의원께서 현대판 사미인곡을 읇게 하셨을까.

식영정 아래엔 서하당(棲霞堂) 등 식영정과 유관한 정자들이 복원되어 있으나 건물의 형식이나 내용이 마뜩치 않다. 분명히 들어온 한 가지 느낌은 "저 정도면 놀기는 좋았겠다" 였으니, 기자의 모난 시각은 유난한 더위 탓만인가. 그나저나 어차피 놀자고 지은 정자들, 탁배기 한 잔에 송강 가사 아는 대로 읇어가며 놀기 좋으면 그만인 것.

노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힘든 일이다. - '더 자두'의 노래 <놀자>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가 가사 문학의 대가임이 분명한 송강 정철 선생의 국문학상 업적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송강 선생께는 송구스럽지만 교과서적 고정관념의 틀에 매인 채 담양 주변 정자들이나 송강의 문학을 보던 생각의 굴레를 벗어나보잔 뜻의 답사기입니다.    

면앙정, 명옥헌, 소쇄원의 순서로 계속 이어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