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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노동자
ⓒ 인권위 김윤섭
노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89년 주 48시간제 하루 8시간 6일 근무에서 44시간제 주 6일 토요 4시간 근무 로 바뀌었고, 2004년 7월 1일부터 주 40시간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흔히들 말하는 '주5일 근무 시대의 개막'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통과된 법안은 주40시간제 법안이지, 주5일제 법안이 아니다. 경영계에서 누누이 '40시간제=주5일제'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주5일제가 도입됐으니 공휴일을 축소해야 한다고 나서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내년부터 공휴일이 2일 줄어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주40시간제의 혜택도 보지 못하면서 공휴일만 줄어들게 된 중소영세업체 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은 임금과 고용조건만이 아니라 노동시간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주5일제가 아닌 주40시간제의 도입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조항은 기업규모별 단계적 도입이다. 2004년 1000인 이상 사업장과 금융·보험업, 정부투자기관 등에서 주40시간제가 시행되었으며, 올해 30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고 그리고 향후 기업규모별로 단계적으로 적용되어 2011년에 가서야 전 노동자에게 적용된다.

낮은 임금, 낮은 사회보험 적용률, 열악한 노동조건,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리는 중소영세업체 노동자들과 비정규노동자들은 노동시간 측면에서도 차별받고 소외된다. 주5일제 시대라는 화려한 수사의 저편 그늘에는 사회적 차별을 더욱 강화하는 노동시간단축법안으로 한 번 더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좌절과 분노가 서려 있다.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에도 단계별 수준차가 있다는 것인가? 영세업체에 근무하는 노동자에게 주5일제는 남의 얘기다. 주5일 수업이 점진적으로 도입되면서 자녀가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에도 여전히 작업장을 향해 나서는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주5일제가 시행되는 사업장의 비정규노동자들은 정규직과 같이 토요일에 쉬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쉬지 못할 때 느끼는 비애 못지 않게 쉴 때의 고통도 크다. 낮은 임금으로 인해 정규직처럼 제대로 쉴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임금이 줄어드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택시기사나 영세 자영업자 같은 주변노동자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경제적인 손실도 무시할 수 없다.

▲ 건설노동자
ⓒ 인권위 김윤섭
왜 이렇게 되었는가? 단계적 도입과 휴일휴가 축소 방안은 고용의 양과 질을 모두 높일 기회를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목표와 기업의 인건비 부담 축소라는 과제를 동시에 고려하느라 무엇을 하려는 법인지 모를 절충적인 기묘한 제도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40시간제 혜택을 보는 현업 노동자들은 일하는 시간을 줄여 여가를 늘리려면 임금 삭감을 감수해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했다. 대기업 정규직이래 봐야 한국사회에서 그리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계층은 아니며, 장시간 잔업을 해야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엄포와 노후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사회복지제도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의 선택은 자명하다. 줄어든 4시간분의 정규 노동시간은 대부분 시간외 노동의 몫으로 이름만 바뀌었다. 그 가운데 차별축소, 고용확대, 고용의 질 향상의 기회도 사라졌다.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적 의의를 조금도 살리지 못한 누더기 법안에 대해 조직된 노동자들이 타협적으로 대응한 가운데, 노동시간 단축에서도 소외된 비정규노동자들과 중소영세업체 노동자들의 소외와 배제는 심해졌다. 한 국가 안에 두 국민을 만드는 일에 정부와 경영계가 앞장서고, 노동계가 반작용을 못하는 사이 벌어진 일이다.

과연 주5일제를 이렇게밖에 시행할 수 없었는가? 대답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자들 사이의 차별과 분리를 낳는 기업 경영방식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시행된 노동시간 단축으로 오히려 삶의 질 하락을 느껴야 하는 주40시간제가 아니라, 좀 더 평등한 사회로 전환할 계기가 되는 주5일제의 선택은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하다.

기업의 감원 위주의 고용조정이 여전히 문제 되고 실제 느끼는 실업의 공포는 외환위기 때를 방불케 할 정도다. 일자리를 찾더라도 수시로 해고되는 열악한 비정규직 일자리뿐이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주5일제의 혜택을 골고루 나누면서 비정규직의 차별을 줄이고 안정된 일자리를 확대하는 긍정적 해법이 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며 생산성의 핵심 원천인 창의력과 집중력은 노동시간 길이와 비례하지 않는다.

노동시간 단축의 긍정적 계기를 촉진할 방법으로 정부가 지원하고, 기업은 수익성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성을 중시하며, 노동자는 사회적 권리에서 배제된 노동자들과 연대의 정신을 발휘할 경우 실업자를 줄이고 비정규직을 줄일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문제의 근원은 현 노동시간단축법이 차별 심화와 고용의 질 악화를 유도하는 악법이기 때문이다. 차별축소, 고용확대, 전 노동자와 노동계층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긍정적 계기를 살리는 주5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21세기형 신분제'가 될 수 있는 단계적 도입 조항부터 하루빨리 뜯어고쳐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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