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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흥덕왕릉을 에워싸고 잇는 솔숲
신라 흥덕왕릉을 에워싸고 잇는 솔숲 ⓒ 추연만
흥덕왕릉 숲은 보통사람의 희로애락 품어

입구에서 왕릉까지는 대략 200mm거리. 키 작은 구부정한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숲을 이룬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띈다. 야산에 가면 흔히 보는 보통의 소나무가 숲의 주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일반인 무덤과 달리 왕릉에는 곧고 큰 나무가 있을 것이란 예단은 어김없이 빗나간다. 그러나 수천 그루가 넘는 '보통 소나무'는 세월과 더불어 이 숲에 자리를 잡아 예사롭지 않는 숲을 이룸으로써 왕릉의 위엄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비록 소나무는 단 한 그루도 똑바로 선 것 없이 기울고 뒤틀린 채 숲을 이루지만 보통사람들이 세파에 찌든 마음을 추스르기엔 딱 좋은 분위기를 만든다. '소나무에 나서 소나무로 죽는다'는 말처럼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겐 친근한 나무다. 아이가 태어나면 솔가지로 금줄을 쳐 액운을 막을 뿐 아니라, 죽으면 송판으로 널을 짜는 것까지 우리 생활과는 떼려야 뗄 수 없어 '소나무 문화'라 불러도 지나친 말을 아닐 지경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들은 궁궐이나 큰 건물의 목재로 쓸 금강송과 같은 곧은 나무보다 불쏘시개나 여염집 대들보로 쓰는 평범한 소나무에 더 정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흥덕왕릉 소나무는 소담스럽지만 보통사람의 희로애락을 품을 것 같아 더욱 정감이 간다.

눈 뜨고 낮잠을 즐기던 청솔모가 '소리'에 잠을 깬 듯.
눈 뜨고 낮잠을 즐기던 청솔모가 '소리'에 잠을 깬 듯. ⓒ 추연만
생명체는 솔숲과 조화를 이룬 자연의 일부

솔숲의 바람은 생명력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 그 소리마저 일품이다. 산비탈을 오른 바람을 머금은 후 "쏴~"하고 솔바람 소리를 낼 때면 귀가 무척 즐겁다. 인적이 드문 솔숲 여기저기엔 까치들도 날고 이름 모를 작은 새들도 나무를 오가며 노래한다.

이방인이 온 것도 모른 채 청솔모는 나뭇가지에 엎드려 낮잠을 자고 있다. 반복되는 "쏴~"하는 솔바람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소리 탓인지 어느새 잠에서 깨어 놀란 듯 주위를 경계한다. 이렇게 생명체들은 솔숲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다.

또 소나무 숲은 왕릉의 위엄과 문화가치를 더욱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한다. 야산에 솔숲이 없고 큰 무덤만 홀로 있다면 왕릉의 위엄은 지금보다 훨씬 반감될 것이란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자연과 분리된 허허벌판에 아무리 큰 무덤을 세운 들 무슨 경외감이 들겠는가? 역설적으로 보면 왕릉은 솔숲을 포함해 산자락의 일부로 존재할 때 그 가치가 더 빛난다.

왕릉 오르는 숲길을 지나는 동안 능에 관한 여러 질문은 흥덕왕릉의 가치를 더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능은 다른 무덤과 다른 어떤 것이 있을까?' '왕릉 조각들은 어떤 예술성이 있을까?' '흥덕왕은 왕비에 대한 순애보 사랑으로 합장무덤이라는데, 어떤 설화가 있을까?'

흥덕왕릉
흥덕왕릉 ⓒ 추연만
흥덕왕은 왕비에 대한 순애보의 주인공

소나무 사이로 엿보는 왕릉에서 그 신비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 왕릉은 어느새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왕릉 주위의 조각상조차 천년을 뛰어넘어 파릇한 잔디처럼 생기가 도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삼국유사> 의 기록에 따르면 흥덕왕은 왕비에 대한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기록되고 있다. 흥덕왕은 왕위에 오른 첫해에 왕비 장화부인을 잃었으나 재혼을 하지않고 아내를 그리며 평생 홀로 지냈다는 것이다.

"제42대 흥덕대왕이 보력 2년 병오(826)에 즉위하자 얼마 안 되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신하가 앵무새 한 쌍을 가져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놈은 죽고 홀로 된 수놈이 늘 구슬프게 울어댔다. 왕이 사람을 시켜 거울을 그 앞에 걸도록 했더니 새가 거울 속 그림자를 보고 제 짝을 만난 줄 알고 거울을 쪼아보았다가 제 그림자인 줄을 알고는 슬프게 울다가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이후 왕은 "내가 죽거든 왕비와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겨 흥덕왕릉은 왕과 왕비가 합장한 무덤인 걸로 알려졌다. 그래서 이 왕릉은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서 나누는 곳으로 유명하다.

'사랑의 설화'가 픽션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후세인들에게 흥덕왕의 사랑을 닮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을 어르신에 따르면 흥덕왕릉 봉분 바로 앞 옛 상석을 만지면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는 구전에 따라 사람들이 하도 상석을 만져서 돌이 닳았다고 한다(지금은 새 상석으로 교체되었다).

비석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 받침대가 남아있다. (저 큰돌을 어디서 누가 어떻게 옮겼을까)
비석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 받침대가 남아있다. (저 큰돌을 어디서 누가 어떻게 옮겼을까) ⓒ 추연만
흥덕왕은 완도의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해 서해 방어와 국제무역을 번창케 한 신라왕이었으며 당나라 사신으로 간 대렴이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 자락에 심게 해 우리나라 차 문화를 일으킨 업적의 주인공이다. 이로 보아 흥덕왕은 쇄락한 신라왕조의 부흥을 꽤한 개혁정책을 편 장본인으로 짐작된다. 당시 신라는 왕의 제위기간이 평균 8년일 정도로 왕권이 매우 약화된 상황이었다.

중앙 귀족은 부패를 일삼고 지방 호족들은 점차 세력을 넓혀가는 가운데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린 민심은 왕권에 등을 돌렸다. 11년 동안 왕위를 누린 흥덕왕이 사회개혁을 추진하기엔 역부족일 정도로 신라는 쇄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의 사가들은 '사랑의 설화'를 기록함으로써 왕의 개혁 카리스마보다 유약한 면을 부각했는지도 모른다.

뒤틀린 소나무. 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애절한 '사랑 설화'가 생각난다.
뒤틀린 소나무. 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애절한 '사랑 설화'가 생각난다. ⓒ 추연만
왕릉 주위엔 왜 소나무가 많을까?

왕릉을 왜 궁궐과 먼 이곳에 세웠을까?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흥덕왕릉은 경주 왕경과 먼 거리에 있는데 그 이유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다른 왕릉에는 거의 없는 비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비석이 없고 거북 모양 받침대만 있어 아쉬움이 많다.

왕릉 주위엔 왜 소나무가 많을까? 병풍처럼 펼친 소나무는 보기에도 좋고 솔숲의 맑은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한다. 봄 가을철에 안강읍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오면 숲은 그늘을 제공하며 자연의 선물을 만끽토록 한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소나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소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많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 나간다. 그래서 자연송림에 흥덕왕릉을 세운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금강송 같은 소나무로 인공조림을 했다면 그 나무들은 이런저런 용도로 베어지고 숲은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구부정한 소나무들은 나름대로 번식을 거듭했고 비록 생물학적으로는 '우성'(優性: + 유전인자) 이 아닌'열성'일지라도 지금의 자리에 걸맞은 솔숲을 만든 것으로 추론된다. 이를 특별한 무엇이 아닌 '평범함'이 만든 아름다움이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 생각 끝에 흥덕왕릉과 솔숲은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인근의 구강서원 솔숲이 좋다. 그러나  곧은 소나무는 흥덕왕릉 솔과는 다른 멋을 풍긴다.
인근의 구강서원 솔숲이 좋다. 그러나 곧은 소나무는 흥덕왕릉 솔과는 다른 멋을 풍긴다.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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