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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인생 40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견 연기자로 발돋움한 변희봉(왼쪽)과 임현식
연기 인생 40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견 연기자로 발돋움한 변희봉(왼쪽)과 임현식 ⓒ 오마이뉴스 권우성/나영준

"에헤, 그 노인네 거 참!"

영화 <살인의 추억>, 살인 현장인 논둑에서 자빠지는 변희봉에게 던진 송강호의 한마디. 그 장면에서 모두 킥킥거렸겠지만 그 한 장면을 위해 그가 100번 이상 구른 사실을 관객들은 알고 있을까?

"줄을 서시오~", "장금아~이"라고 외치며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을 보며 시청자들은 방바닥을 구르지만 "컷" 사인이 떨어진 후, 숨을 몰아쉬어야 하는 고단함은 온전히 연기자 임현식의 몫이다.

2005년. 수많은 이들이 드라마의 명대사를 읊어대고 주인공들의 옷차림을 따라하거나 자발적인 팬클럽을 만들어 드라마가 남긴 잔상에 행복해 한다. 하지만 휴대전화 벨소리로 드라마 주제곡이 울려대고, 주인공이 먹던 음식을 음미하며 기뻐하는 그 모습에서 70~80년대 아이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함께 웃고 슬퍼하던 풍경을 떠올리긴 힘들다.

만년 조역에서 개성만점의 영화배우로 다시 태어난 변희봉(64). 1천여 편의 크고 작은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유독 '순돌 아빠'로 기억되는 임현식(60). 강산이 여러 번 바뀔 동안 수많은 작품 속에서 감초 역할을 도맡아 온 두 사람이 기억하고 느끼는 드라마의 변화상은 어떨까.

임현식씨를 만난 건 지난 17일 KBS 방송국에서다. 변희봉씨는 다음날인 18일 <오마이뉴스> 스튜디오를 찾았다. 요즘 한창 드라마와 영화 촬영 일정에 쫓기는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모으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빛나는 조연'이라는 공통분모 덕일까?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가상 대담 형식으로 엮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의 공통분모는 '주연 뺨치는 조연'

- 두 분 모두 오래 전에 드라마를 시작하고 많은 작품을 겪었겠다.
임현식 : "1969년 MBC 공채 탤런트 1기로 출발해 1000여 작품을 했다. 영화는 몇 편 안 되고 거의가 드라마다. 욕심껏 하자면 좋은 영화나 연극, 뮤지컬도 탐이 난다. 젊은 친구들이 무대에서 멋지게 땀 흘리는 걸 보면 사실 부럽다(웃음). 하지만 TV쪽에 시간을 쏟기에도 바쁘다. 시청자 여러분들과 똑같이 세월을 흘려보내고 나이를 먹는 것에 만족한다."

변희봉 : "1966년에 탤런트가 아닌 성우로 출발했다. 70년대 초에 TV 출연 제의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드라마에서 활동을 하다가 99년도에 봉준호 감독의 연락을 받고 <플란다스의 개>에 출연을 하게 됐다. 그 후로 어떻게 하다보니 (영화가) 전직이 되어 버린 셈이다. 하긴 요즘은 TV에서 잘 쓰지도 않는다(웃음)."

임현식 : "예전 <암행어사>라는 드라마를 4년 반이나 했다. 다 재미있게 봐주신 덕분이다. 그리고 <한 지붕 세 가족>은 6년 반이다. 이젠 시청자 분들도 나처럼 나이를 먹었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거다. 나도 (머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숱이 적어지지 않았나."

변희봉 : "단막극 활동을 많이 했다. 아마 촌스러워서 그랬는지 연속극에는 잘 불러주지 않았다. <수사반장> <113수사본부> 등에서 주로 간첩, 사이비교주 등 범죄형의 안 좋은 배역만 맡았다. 그때 딸아이에게 TV를 못 보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밖에서 듣고 다 알더라(웃음). 사실 단막극이나 사극을 많이 했고 드라마는 30여 편밖에 안 된다."

젊은 배우들만 주인공하라는 법 있나!

드라마 <허준> <대장금> 등에서 감초 역할로 깊은 인상을 남긴 탤런트 임현식
드라마 <허준> <대장금> 등에서 감초 역할로 깊은 인상을 남긴 탤런트 임현식 ⓒ 나영준
- 거대 자본이 간접광고를 비롯해 제작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부 스타배우들의 개런티가 폭등하는 문제도 있고 외주제작의 경우 다소 선정적인 내용이 방송되기도 하는데.
임현식 : "어차피 자본주의 시장에서 불가피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사실 지금까지 문화예술인들이 배가 고팠다. 좋은 후배들이 좋은 개런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미국이나 일본 등을 봐도 그런 부분에 있어선 욕을 먹는다. 발전해 나가는 단계에 있는 부작용으로 생각한다. 큰 흐름을 막을 순 없다. 사실 나도 그렇게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웃음)."

변희봉 : "외주 제작의 경우라고 해도 이미 드라마 제작을 경험했던 이들이라면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 경우에 따라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는 것이 흠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제작을 하던 배우는 열심히 연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런 것들이 좀더 정상적으로 운영이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 프라임 타임의 드라마들을 보면 늘 젊은이들이 주인공을 독차지하는데 아쉽지 않은지, 또 그들로 인해 드라마가 좌지우지 되는 상황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변희봉 : "아쉽다. 많이 아쉽다(웃음). 사실 이런 이야기는 좀 그렇지만 요즘 젊은 여배우들을 보면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배우들을 뽑을 때 너무 획일적인 기준에 맞춘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여러 요소를 포함한 다양성을 조금만 인정했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임현식 : "사실 그런 건 근래의 일만은 아니다. 약 10여 년 전부터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스타들에 의해서 작품이 휘어져 나가는 일이 종종 있다. 때로는 진솔한 내용이 결여 되는 것 같아 마음에 안 들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드라마다운 드라마로 제 자리를 찾아 가기를 바란다."

KBS <올드미스다이어리>에서 우현과 단짝을 이뤄 감초 연기를 펼치고 있는 임현식.
KBS <올드미스다이어리>에서 우현과 단짝을 이뤄 감초 연기를 펼치고 있는 임현식. ⓒ KBS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정말 억울하다!

- <올드미스 다이어리>에서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손찌검 장면에 논란이 있었다. 드라마의 내용이 다소 폭력적이고 선정적으로 간다는 지적이 있는데.
임현식 : "(조금 망설이다)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닌데…솔직히 사회적으로 잘못 받아들여진 것이다. 실제 할머니가 뜨거운 물에 덴 손자를 병원에 데려갔을 때, 뒤늦게 달려온 며느리가 '아이를 어떻게 관리 했느냐'며 시어머니의 뺨을 날려 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 해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어 만든 이야기다. 그런데 어떻게 그림 하나만을 가지고 전하고자 하는 뜻을 곡해하나. 억울하다."

변희봉 : "그런 점이 없잖아 있긴 하다. 하지만 서양의 드라마에 대해선 관대한 이들이 유독 우리나라 것에 대해서만 엄한 잣대를 들이댄다. 세상이 변해가고 드라마도 그 흐름에서 비켜설 순 없는 것 아닌가. 물론 대중매체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조심해야 한다. 또 만드는 이들이 최소한의 윤리 정도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좋은 드라마엔 가족의 냄새가 나야한다

드라마보다는 스크린 나들이가 잦은 변희봉. 영화 <살인의 추억> <선생 김봉두> 등에서 그의 열연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드라마보다는 스크린 나들이가 잦은 변희봉. 영화 <살인의 추억> <선생 김봉두> 등에서 그의 열연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드라마의 내용이 예전과는 많이 바뀌었다고 보나.
변희봉 : "변화무쌍하다. 70년대는 가정적인 이야기가 많았고 80년대는 흑백에서 칼라로 바뀐 시대였으며 여러 시대적, 정치적 영향을 받기도 했다. 90년대는 가족시대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시대로 가기 시작해 2000년대엔 젊은 사람이 아닌 나이 먹은 이들은 무엇을 해도 힘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웃음)."

임현식 : "그간 역할이나 스토리에 다양성이 많이 늘어난 것 같지만 한 편으로는 일정방향으로 함몰된 듯도 하다. 분명 만드는 분들의 성의부족 부분도 있을 것이다. 많은 경험을 쌓은 이로써 함께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는 것 같다."

- 좋은 드라마란 어떤 것인가? 또 좋은 드라마는 좋은 시청자가 만든다고 할 수 있을까.
임현식 : "바로 그거다. 그렇지만 현실은…. 사실 그 모든 게 시청률 경쟁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시청률을 올리는 이들이 젊은 층이다. 연예오락 프로그램도 우리도 뭐가 뭔지 모르는 내용들로 채워지고…. (입맛을 다시며) 글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니 만들어 지고 있긴 하겠지(웃음)."

변희봉 : "무엇보다 느끼고 생각하는 면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남녀가 사랑을 하는 것 다 좋다. 하지만 그 안에 어머니와 아버지 등 가족의 이야기가 묻어 있어야 한다. 가족을 잊고 나는 나, 너는 너 식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화두는 '가족'이다."

임현식 : "사실 청춘물이 아니라도 통할 수 있다. 외국만 보더라도 노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많지 않은가. 우리의 경우 그런 걸로 승부가 안난다고 생각하는 건지 쓸만한 작가가 없는 건지. 드라마를 시작하다 보면 우리 쪽의(노년의) 이야기도 나올 것 같아 기대를 하지만 하다보면 흐지부지 끝날 때가 3/4이다."

변희봉 : "시청자들도 드라마가 현실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주셨으면 한다. 방송사들이 경쟁을 하다보니 다소 과한 부분도 있지만 길게 보면 좋게 정리를 하게 된다. 도중에 보시는 분들은 화도 내고 여러 말씀하시는 걸 이해한다. 널리 양해해 주셨으면 한다. 액면 그대로가 아닌 이야깃거리 정도로만 받아들여 주시면 고맙겠다."

변희봉은 2006년 개봉 예정인 봉준호 감독 영화 <괴물>에 송강호, 배두나, 박해일 등과 함께 주연급으로 캐스팅됐다.
변희봉은 2006년 개봉 예정인 봉준호 감독 영화 <괴물>에 송강호, 배두나, 박해일 등과 함께 주연급으로 캐스팅됐다. ⓒ 청어람

-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 달라.
변희봉 : "요즘은 뭐랄까… 좋은 물을 만난 느낌이다. 현재 <괴물>이라는 작품을 찍으며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 등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여느 영화와는 다르리라 확신한다. 기대하셔도 좋다. 더 많은 관객이 올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데 힘쓰겠다. 지금은 잠시 떠나 있지만 드라마들도 잘 됐으면 한다."

임현식 : "9월부터 <대장금>의 이병훈 PD와 함께 하는 <서동요>를 준비 중이다. 그간 뚜렷한 활동이 없었던 차라 욕심을 내고 있다. 남은 인생, 열심히 해서 좋은 방송 만들겠다. 지켜 봐 달라, 끝! 허허허."


두 사람을 만난 후 떠올린 것은 '배우'보다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일주일 내내 드라마 촬영에 시달린다는 임현식씨는 피곤에 지쳐 보였지만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웃집 순돌이 아빠의 친근한 미소를 안겨 주었고, 영화 촬영으로 나흘 밤을 꼬박 지새웠다는 변희봉씨 역시 "그래도 즐겁다"며 자상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느덧 나이는 '원로급'이 됐지만 언제나 곁에 있는 그들의 얼굴은 '배우' 이전에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집을 허물고 새로 지어도 바뀌지 않는 이웃의 모습처럼, 드라마는 변화해도 늘 그 곳에 있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들의 '주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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