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포사회의 공공연한 비밀 하나. 부모세대의 치열한 교육열 덕에 자녀들의 명문대학 진학률은 눈에 띄게 높은데 졸업 후 이들이 정작 미국의 어느 대기업에 취직해 어떻게 출세했는지는 별로 들려오는 소식이 없다는 것. 하버드, 스탠포드, 예일 등 이들이 입학하는 명문대학의 유명세에 걸맞는 대기업에 취직해 고위직에 승진했다는 한국인 1.5세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간혹 한국의 일간지에 미국 유수기업의 임원급 직원으로 승진한 한국인에 대한 기사가 나오기도 하지만, 이런 것이 기사거리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인이 승진하는 사례가 그만큼 드물다는 반증이다.
교포 1.5세인 제인 현의 신작 <대나무 천정을 뚫으며: 아시아인을 위한 경력관리 전략>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여성에 대한 직장 내 차별의 은유적 표현인 '유리 천정(glass ceiling)'에서 착안한 '대나무 천정(bamboo ceiling)'이란 표현은 바로 승진과 직장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당하고 있는 미국 내 아시아인들의 고민을 상징하는 신조어다.
어느 인종보다 교육열이 뛰어나고 미국 내에서 차지하는 절대 비중 또한 꾸준히 상승 중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은 유수 대기업에 취직이 잘 되지도 않고, 된다 해도 고위직에 승진하는 비율 또한 낮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의 간부직 중 아시아계의 비중은 1%에 불과하며, 아시아계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다는 실리콘밸리에서조차 중견간부직의 아시아인 비중은 12.5%에 불과했다.
제인 현은 아시아인들이 뜨거운 교육열에 비해 직장 내 승진이 저조한 가장 큰 이유가 튀는 사람을 경원시하고 겸양의 미덕을 강조하는 아시아의 문화적 전통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제인 현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의 속담을 대표적인 사례로 내세우고 있다.
상사와 연장자를 존중하라는 부모세대의 가르침에 따라 회의시간에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다소곳이 기다리는 것이 대다수 아시아인들의 모습이지만 이들이 발언할 기회는 결국 오지 않는다.
제인 현은 동료나 상사들이 아시아계 직원의 이런 모습을 이들이 자신감이 없거나 업무에 적극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업무에 대해 무관심한 것으로 해석한다고 지적한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이 달성한 성과에 대해서는 자랑도 할 줄 아는 백인들이 직장 내에서 상사의 눈에 띄어 인정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 자신이 J.P 모건의 인사담당 직원이었던 제인 현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화력이 부족한 한 상사를 면전에서 평가하게 된 당황스러운 상황을 떠올린다. 제인 현은 20년이나 연배인 상사를 평가하면서 외교적이고 공손한 언어를 사용했지만 상사의 장·단점은 분명하게 적시해 인사고과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고 회고하고, 아시아계가 직장 내 갈등을 회피하지 말고 이를 적절하게 다루는 기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제인 현의 책은 암암리에 존재하는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이라는 외부요인보다 아시아인 내부의 문화적 요인에서 아시아인의 직장 문제를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한국계 교포를 포함해 이 책을 읽은 아시아계 독자들은 부모세대로부터 배운 겸양의 미덕이 오히려 승진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며 공감을 표하고 있다.
아마존에 서평을 남긴 한 교포 1.5세는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라며 언행에 신중을 기하라는 교육을 부모로부터 받아왔지만 이것이 오히려 승진에 걸림돌이 됐다"며 제인 현의 지침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한국의 교포 1.5세들이 제인 현의 책을 읽고 '겸양의 미덕'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한다면 미국에서 취직과 승진이 잘 돼 직장을 잡기 위해 한국으로 회귀하는 행렬이 줄어들 수 있을까?
미국과 아시아의 교역이 급증하는 글로벌 경제에서 오히려 영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한자어 섞인 보고서 정도는 능숙하게 써낼 줄 아는 교포 1.5세들이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은 아닐까? 답은 교포 1.5세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