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도조 히데키는 누구인가 | | | | 일본의 대표적 군국주의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는 도쿄 출생으로 일본육군대학을 졸업한 후 관동군 헌병사령관, 관동군 참모장, 육군차관 등을 역임했다. 1940년 제2기 고노에[近衛] 내각의 육군대신이 된 뒤 중일전쟁 확전을 주장했고, 1941년 제3기 고노에 내각을 개전론(開戰論)으로 무너뜨렸다.
도조 히데키는 같은 해 10월 후계내각을 조각하여 육군•내무대신까지 겸임했으며 12월8일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 태평양기지를 기습 공격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개전 후 독재정치를 강화한 그는 1943년 문부•상공•군수 장관까지 겸임했고 한국에서는 징병제와 학도병 지원제를 실시했으며 1944년에는 참모총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전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1944년 7월 총사퇴 했다. 종전 후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히로히토 천황을 대신해 A급 전쟁범죄자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948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 | | | |
-조부를 기억하는가.
"조부에 대한 기억이 많은 건 아니다. 내가 겨우 두 살 때 총리로 취임했으니까. 그 후 3년 8개월 동안 집에 계셨던 때가 별로 없었다. 종전 후에는 우리 가족이 이토에서 5년간 숨어 살아야 했고 조부는 스가모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운전수 등 사람이 항상 많아서 조부와 단둘이 있을 시간은 거의 없었다.
전쟁 중에 어머니는 나와 오빠 히데카츠를 수상관저로 매일 데려가셨다. 거기 가서는 우리끼리만 있었다. 가끔은 조부와 관저에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요리사와 직원들도 있었다. 조부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는 못한다.
오빠는 조부의 무릎에 앉기도 하고 과일을 주시곤 했으니까 잘 기억하고 있다. 오빠는 조부님이 아주 상냥한 분이셨다고 한다. 관저의 운전사와 경찰들이 너무 바빠 아이들을 자주 못 보는 것을 딱하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이들과 정원에서 놀아주시고 장난감을 주시곤 했다.
조부님이 스가모에 계시는 동안 오빠는 자주 찾아가 뵈었다. 조부는 오빠가 앞으로 도조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많이 걱정하셨다. 조부님이 우려하신 대로 우리는 도조라는 이름 때문에 끔찍한 차별을 겪어야 했다. 수업을 받을 수 없었고 학교를 바꿔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구타 당하고 피투성이인 채로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학교에 갈수 없었던 오빠를 위해 개인교사를 두어야 했다. 전쟁 후 일본의 모습이 그랬다.
이와나미가 내 진짜 이름이지만 최근까지는 도조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도조는 50년간 금기시 된 이름이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영화 <긍지-Pride>(14만부가 팔린 도조 유코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 도조 히데키를 묘사했으며 일본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 덕분이다."
-일본 학교에서 조부에 대해 좀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조부가 젊은 사람들이 본 받을 만한 모범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는가.
"조부님 개인에 대해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서구에 강한 인상을 준 건 메이지 시대가 처음이었다. 스코틀랜드, 터키 등의 나라에 우리 이름을 딴 거리와 빌딩이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였다. 이런 일들에 대해 가르치고 긍지를 가져야 한다. 당시의 국제적 상황과 도쿄전범재판의 진실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는지 알려야 한다.
당시 일본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석유나 철이 나지 않았고 해외의 모든 자산은 동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일어나지 않고서 수백만 명의 일본 동포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었겠는가? <아사히> <요미우리> 등의 신문들도 '도조는 무슨 생각인가? 왜 반격하지 않는가?'라며 독촉해댔다. 언론도 책임없다고 발뺌하지는 못 할 것이다. 일반대중도 마찬가지였다. 5학년 짜리 초등학생들조차 철이나 석유가 없다면 일본이 어떻게 될지 물어왔다. 그렇지만 지금은 천황폐하의 전쟁 책임을 묻고 있다. 이는 정말 슬픈 일이다.
일본 정부가 이를 다 감추고 있다. 조부님께 합당한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조국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존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도조 히데키 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싸우고 죽은 260만 명의 군인들 말이다.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고 학교에서 이를 가르쳐야 한다."
-조부를 '영국과 미국과의 타협 자체를 원치 않았던 극단적 민족주의자이자 파시스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원래 온갖 말들을 다한다. 조부님은 조국을 사랑하셨다."
-히틀러에 대해서도 그렇게 변명할 수 있지 않는가? 그도 자신의 조국을 사랑했다.
"아니다, 그는 자신의 동포인 유태인들을 학살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들도 당신처럼 말할 수 있다. 그가 다른 무엇보다 독일을 사랑했다고. 그리고 '유태인은 진짜 독일인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조부님은 동포를 죽이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이는 어쩔 수 없었던 전쟁 탓이다. 각 나라의 입장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서 당시 국가들이 왜 전쟁을 치러야 했는지 가르쳐야 한다. 일본이 나빴다는 소리만 반복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일본인들은 긍지를 가질 수 없다."
"난징대학살? 근거없는 소문일 뿐이다"
-일본이 유태인을 죽이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수백만 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건 전투 때문이다. 혼동하지 말라. 편병(便兵:민간인으로 위장한 군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들은 민간인으로 가장하고 뒤에서 일본 군대를 습격한 군인들이다. 체포한 후에만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호주, 영국, 미국에서는 모르겠지만 난징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사건에는 편병들이 많았다. 서구 기자들은 모두 이 난징 사건을 학살로 믿고 있고, 중국에서는 3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난징에는 150개국에서 온 기자들이 있었다. 군대가 진입해서 (여기서 그녀는 개선해 입성한다는 단어(入城, にゅうじょう)를 사용했다) 난징 공격을 개시했을 때 기자들도 이들과 같이 있었다. 일본측이 얼마나 난징 입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나 보여주는 일화다. 욘 라베(John Rabe)와 난징안전지역을 위한 국제위원회가 안전구역을 설정해 20만 명을 수용했다. 그런데 어떻게 30만 명이 죽을 수 있는가?"
-그런 주장은 이미 여러 번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난징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밖에서 온 피난민들로 넘쳐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정확한 숫자 없이도 일본군이 잔학 행위를 저질렀음을 알 수 있다. 욘 라베 등 많은 증인들이 있었고 나치였던 그조차 일본군대의 잔학행위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도쿄전범재판에서 난징 사건을 목격한 증인은 한 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다.(傳聞(でんぶん) ばかり)"
-증인은 라베 뿐만이 아니다. 뉴욕 타임즈와 맨체스터 가디언 등의 기자들이 있었고 수 천명의 중국민들도 이를 목격했다.
"현재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후지오카씨('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소속)가 중국측이 당시의 사진들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하나하나 밝혀냈다."
-일부 조작된 증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극히 일부의 증거만 믿고 그에 반박하는 엄청난 양의 증거는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가?
"(참을성을 잃고) 어찌되었든 한쪽 얘기만 듣고는 진실을 알 수 없다. 소문만 무성하기 때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봐야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과 일본이 협력해서 역사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각국의 입장(立場, たちば)이 다르기 때문에 공동의 역사 인식은 불가능하다. 진실은 하나인데 중국과 일본의 해석은 종종 완전히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한국인들에게 영웅이지만 우리에게는 범죄자다. 이런 입장 차이 때문에 공동의 역사 인식은 불가능하다."
-731 부대에 대해 묻고자 한다. (도조 히데키는 731부대가 생체실험을 시작할 때 만주 관동군 헌병사령관이었다. 그는 731부대의 책임자인 이시이 시로의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만주에서 일어난 일은 전혀 알지 못 한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야스쿠니 신사 같은 일이라면 나한테 물어보라. 하지만 다른 일은 역사학자에게 문의하기 바란다."
-하지만 들어는 보았을 텐데….
"중국 측이 제시한 해충 소독 연구 사진을 본 적은 있다. 아는 바 없다."
-왜 조부는 다른 사람들처럼 할복하지 않았나?
"무솔리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것이다. 길거리에서 린치당하고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히틀러의 죽음도 비극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조부는 그런 죽음을 원치 않으셨다. 물론 자신의 죽음이 전세계로 알려질 것도 아셨다. 머리를 쏘고 자살해서 산산 조각난 얼굴의 사진이 전세계에 실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심장을 쏘아 출혈과다로 돌아가실 심산이었지만 조부를 재판에 세우길 원했던 미군이 조부를 살렸다."
-미국을 싫어하는가.
"미국을 싫어했다면 내 딸이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딸은 보잉사에서 일하는 미국 시민과 결혼해서 미국에서 살고 있다.) 조부님은 미국에 탄복하셨고 우리가 미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미국인 변호사들이 재판에서 조부님을 변호했다는 놀라운 사실들을 말했다. 다른 변호사들은 연합군의 행동을 크게 비난했다. 조부님과는 적이었지만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천황폐하 없이는 일본도 없다"... "맥아더도 침략전쟁이 아니었다고 했다"
-천황에 대해 물어도 괜찮겠는가? 천황을 위해 죽는 일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수백만 명이 교육받은 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황폐하를 위해 죽는 일이 아름다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날 때부터 사무라이로, 군인으로 교육받았다. 천황폐하를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천황폐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믿음으로, 나라를 지키는 데 제 몫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건 그 때 일이다. 좋든 나쁘든, 현재 우리가 어떻게 보든 상관없는 일이다. 일본은 지난 60년간 평화로웠다."
-다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는가? 특히 중국을 상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며 세계가 그냥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무슨 일을 벌이려 하면 대만, 미국 등이 관여할 것이며 온 세계가 주시할 것이다. 일본이 중국과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우리가 경제 강국일지라도 군사강국은 아니라고 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자위대 외에는 군대도 없으며 핵무기도 없다.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이다. 우리는 호전적인(攻擊的 こうげきてき) 나라가 아니다. 우리가 당시 전쟁에 참여한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공격 가능성은 어떻게 보는가.
"정상적인 나라는 아니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의 북한과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사이에 서로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지 않는가?
"말도 안 된다. 그런 비교는 하지 말기 바란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다."
-천황은 전쟁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천황폐하는 무엇보다 평화를 원하셨다. 폐하는 특별한 존재다. 그분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일본의 황실은 영국 왕실과는 다르다. 폐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많은 일본인들은 '폐하, 만수무강하소서!'라며 죽어갔지 '도조 장군님 만세'라고 외치지는 않았다. 이런 사람들 260만 명의 위폐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이유다.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조부는 천황에 대한 반감은 전혀 없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는데 천황만 살아남았다.
"천황폐하 없이는 일본도 없다. 조부님과 다른 사람들은 폐하와 일본을 지키기 위해 죽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에 대해 이제는 이야기조차 할 수 없다. 종전 후 천황폐하가 '일본의 상징'이라고 교육한 것은 폐하에 대한 모독이다. 폐하야 말로 일본의 근간이다. 미국 대통령과는 다르다. 폐하가 바로 일본이다."
-하지만 천황 자신은 황실의 선조가 한국에서 왔다고 인정하고 있다.
"황실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폐하가 그런 말씀을 하신 것에는 놀랐다. 폐하(폐하를 의미하는 일본어 へいか가 쇼와 천황을 얘기하지 현재 황실의 주인을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했다)라면 그런 말씀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분은 무엇을 말해서는 안되지는 아셨다. 현 황태자께서는 아무 말씀이나 다 하시는 경향이 있다. 나라의 근간으로서 하실 말씀과 안 하실 말씀은 가리실 줄 알아야 한다. 황실의 위엄을 지키셔야 한다."
-천황은 일장기와 기미가요 문제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국기와 국가(國歌)가 없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왜 일본만 이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조부의 비밀 사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이즈미 총리는 8월 15일에 참배하겠다고 약속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중국이나 다른 국가들의 압력은 무시해야 한다. 이는 내정에 관한 일이다."
-중국은 항의할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수백만 명을 죽였다.
"중국은 샌프란시스코 협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도쿄전범재판 협정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가 이제 와서 전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중국이 불평을 하는가? 일본은 중국 국민당(KMT)과 싸웠지 공산당과 싸우지는 않았다. 중국은 이제 완전히 다른 나라다. 중국과 일본은 그 후 협정을 맺었고 전범과 죄수들이 풀려났다. 전범이라는 말이 중국과 일본 간의 협정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중국은 이 협정을 준수해야 한다. 일본 내정에 계속 관여하는 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일본이 도쿄전범재판의 결과를 승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1952년 5월 3일 맥아더는 일본이 방어를 위한 전쟁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일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자원이 전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조부도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그런 사실을 말할 수 없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맥아더도 침략전쟁이 아니었다고 했는데 왜 이제 와서 협정에도 참여하지 않은 중국이 침략전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럼 자원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는가?
"아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어느 나라도 자기 방어를 인정하고 있다."
-그것이 조부가 스스로를 '전범'이 아닌 '전쟁에 책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인가?
"그렇다. 그 분은 사무라이답게 행동하셨고 훌륭한 군인답게 자신의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셨다. 무슨 근거로 그 분을 범죄자라 하는 것인가?"
[번역 : 민경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