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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꽃잎이 슬퍼보이는 달맞이꽃
노란 꽃잎이 슬퍼보이는 달맞이꽃 ⓒ 노태영
그러나 달맞이꽃은 슬픈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달맞이꽃은 영어로는 이브닝 프림로즈(evening primrose)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야래향(夜來香)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월견초(月見草)라고 합니다. 모두 다 달을 향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꽃말도 ‘기다림’입니다. 덥고 어두운 밤에 달을 기다리는 달맞이꽃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수많은 별들 속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달을 기다리는 마음을 말입니다.

달맞이꽃에 대한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달의 신 아르테미스만을 사랑한 님프의 슬픔과 기다림을 간직한 꽃이 바로 달맞이 꽃입니다. 제우스의 시기로 아르테미스를 만날 수 없었던 님프의 슬픈 기다림이 영원한 기다림이 되어 버린 님프의 사랑이 애절합니다. 달도 없고 별도 없는 곳에서 달의 여신을 기다리는 님프는 결국 죽음이라는 가장 슬픈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르테미스가 이 님프를 찾아 헤매지만 제우스의 방해로 결국 찾지 못하고 무수히 피어난 달맞이꽃만이 달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달의 여신이 자기를 사랑한 님프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밤마다 이 달맞이꽃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달맞이꽃을 들여다보면 달빛이 노랗게 빛나는 것도 달맞이꽃의 사랑과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몸과 맘을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들을 슬프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마음과 생각을 갖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달 하나만을 위해 온몸을 바치고 온 마음을 바친 요정의 애틋함을 달맞이꽃을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여리디 여린 노란 꽃잎이 속살을 드러내 속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름날에 강변을 거닐다 보면 달맞이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던 달밤이 말입니다. 그땐 반딧불이가 죽으면 노란 달맞이꽃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반딧불이가 죽으면 그 영혼이 달맞이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달맞이꽃이 핀 강변을 반딧불이 무덤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어깨동무하면서 달맞이꽃이 피어있는 길을 걸었던 옛날이 그립습니다. 아니 달맞이꽃처럼 다시 그런 날이 오리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밭길을 가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보기 드문 꽃을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며느리밥풀꽃입니다. 며느리밥풀꽃은 흔히 볼 수 있는 꽃은 아닙니다. 아니 예전에는 밭길이나 양지바른 야산에 많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통 볼 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나빠져서 그런지 마구잡이 개발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며느리밥풀꽃은 대개 붉은 자주색으로 된 통꽃모양으로 생겼습니다. 물론 꽃잎의 아래쪽 부분이 길고 넓게 축 쳐져 있습니다. 바로 그 부분에 며느리가 먹다 흘린 밥풀 두개가 붙어있습니다. 영락없는 쌀 밥알입니다.

애달픈 사연을 간직한 며느리밥풀꽃
애달픈 사연을 간직한 며느리밥풀꽃 ⓒ 노태영
며느리밥풀꽃은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착한 아들과 어머니가 살았답니다. 단 둘이서 살고 있으니 아들과 엄마는 서로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아들이 장가를 들게 되어 며느리를 맞이하여 식구가 하나 늘게 되었습니다. 산골에서는 먹을 것이 항상 부족한 생활이 눈에 선합니다. 결국 새색시와 어머니를 집에 남겨 놓고 새신랑은 머슴살이를 떠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머슴살이를 하면 거의 일년 동안은 떨어져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간혹 집에 오는 경우는 농한기나 할 일이 없는 때를 골라 잠시 집에 오게 됩니다.

당연히 집에는 며느리와 시어머니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잘 해주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며느리를 학대하고 힘들게 했나봅니다. 그러나 보니 며느리의 모든 행동과 행실이 시어머니에게는 좋지 않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일로 트집을 잡고 꼬투리를 잡아 며느리의 몸과 마음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깊게 생각해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미워서 그랬겠습니까? 남편도 없는 새색시가 혹시 딴 생각을 하거나 생활이 해이해지는 것을 미리 막으려고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자주 트집을 잡다보니 이젠 모든 것이 좋지 않게 보였겠지요.

그래도 며느리는 착해서 시어머니의 구박을 다 견디어내고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며느리가 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가마솥에 밥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전기밥통이나 압력밥솥에 밥을 하기 때문에 쉽게 밥을 하지만 말입니다. 불을 때서 밥을 하려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불을 지피는 것도 힘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가마솥에 밥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쌀과 보리나 감자를 넣고 물의 양을 적절하게 하고, 불의 세기와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지금이야 건강식으로 잡곡밥도 먹고 보리밥, 감자밥, 무밥도 먹지만 저희가 어렸을 때는 쌀이 부족하기 때문에 쌀을 아끼기 위해 감자나 무나 보리를 섞어서 밥을 지었습니다. 보리쌀이나 감자는 가마솥 바로 위에 놓고 그 위에 쌀을 한 줌이나 두 줌 정도를 놓고 밥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 쌀이 덜 타게 되고 나중에 쌀밥을 퍼서 어른에게 올리기에 편합니다. 신기하게도 쌀밥과 보리밥이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아버지 밥을 쌀밥 위주로 푸고 나머지는 사정없이 섞어버립니다. 결국 쌀밥은 아버지 몫이고 우리는 보리밥으로 배를 채우게 됩니다. 물론 아버지는 항상 몇 숟가락 정도 남겨놓으시곤 했습니다. 바로 막둥이 차지가 되는 것입니다.

밥을 할 때도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새까맣게 타거나 삼층밥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가마솥에서 허연 김이 요란하게 새어나올 때 솥뚜껑을 열고 밥알 서너 개를 입에 넣고 깨물어 봅니다. 어느 정도 뜸을 더 들여야 적당한지 맛을 보는 것입니다.

며느리는 이날도 평소처럼 밥알 서너 개를 꺼내어 맛을 보고 있었는데 이 광경을 본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혼자서 밥을 다 먹어버린다고 생각하여 며느리에게 호되게 매질을 했나 봅니다. 결국 며느리는 밥알을 입에 물고 쓰러져 시름시름 앓다 이 세상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은 달려와 통곡하다 아내를 불쌍히 여겨 양지바른 언덕에 이쁘게 무덤을 만들어 묻어주었습니다.

이듬해 여름이 되자 풀들 속에서 마치 며느리 붉은 입술에 밥알 두 개가 묻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한 며느리가 밥알을 먹다 죽었기 때문에 그 넋이 한이 되어 무덤가에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 여기고 '며느리밥풀꽃'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김태정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가지>(현암사)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슬프고 애달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양의 그리스로마신화나 전설에서 유래한 꽃 이야기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실감이 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이 꽃을 알려면 환경과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솔직히 며느리밥풀꽃을 어렸을 때는 자주 보았고, 쌀밥의 슬픈 사연과 가난의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에 쉽게 이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이해가 쉬웠을 것입니다. 아는 만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 자주 보다보면 스스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운 여름 휴가
즐거운 여름 휴가 ⓒ 노태영
우리 주변에 있는 꽃들은 모두다 자신의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살아가는 삶이 다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지 않습니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자신만의 사연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아내의 맘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꽃이 품고 있는 사연에 감동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도 감동할 수 있습니다. 감동과 즐거움을 내 주변에서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멀리 있는 것에 마음을 주지 말고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이나 가족에게 맘을 주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나 가족이 간직한 삶의 사연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위한 노력이 바로 이해와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웃음을 웃음으로, 눈물을 눈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꽃이 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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