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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 문학동네
나는 남편의 간단한 대답에 그 책 선물이 내 것인 양 기대가 차올랐다. 다시 읽으라면 <모모>나 <자기 앞의 생>이나 다 잘 읽었겠지만 왠지 <자기 앞의 생>은 내가 다 잊어 먹은 수수께끼가 가득 들어 있는 책 같아 언제라도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뚱뚱한 아줌마'라고 말했던 것도, 모모의 입에서 나왔던 그 많은 아포리즘 가운데 유일하게 잊히지 않은 어떤 말하고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외로운 사람은 살이라도 있어야 한다.'

<자기 앞의 생> 하면 떠올랐던 이 말도 정작 다시 읽어 보니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였는데 나는 어문 말로 수십 년 동안이나 간직하고 있었다.

한편, 다른 것들, "행복이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시간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늙었으므로 걸음걸이가 너무 느렸다"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연의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연 속의 예비 부속품인 인간부터 지켜야 할 것 같다" 등등 쟁쟁하게 울려오는 말들이 아닌 꼭 그 말만이 남았다는 것이 자못 의아했다. 소녀적, '살'에 대한 모모의 해석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천재의 유희

남편이 책을 딸에게 주고 나온 뒤, 나는 어떤 생각이 다시 떠올라 딸이 잠들고 나서 그 책을 가져다 저자에 관한 부분을 찾아보았다. 내가 읽었던 70년대 중반 당시에는 '에밀 아자르'라는 아랍식 이름 이외에 저자의 신상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대단한 소설을 써 놓고(내 말은 소설이 대단하다는 개인적인 감상보다 작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공쿠르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을 감추고 있는 어떤 인물의 의식 세계가 아주 궁금했다. 그럴 수 있는 그 인간의 힘이 경이로웠다. 분명 사람이 쓴 것이긴 하지만 작가가 보이지 않기에 그 허구의 소설이 더욱 허구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몇 년 후인 1980년에 원 저자인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과 함께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다는 것과 에밀 아자르를 둘러싼 프랑스 평론계의 이야기를 유서로 남긴 것이 세계적인 화제로 등장했겠지만 나는 도통 몰랐고 또 저자에 대한 궁금증조차도 잊고 지났다. 30년이 되어 가는 지금에야 나는 작가의 진실을 알았는데 상당히 놀라우면서 카타르시스가 되기도 했다.

인간의 욕구 충족 가운데 사회적으로 인정 받고 싶은 것(명예욕)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대전제 속에서, 인간이 그 욕구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사회적 평가와 잣대를 벗어나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가, 혹은 인간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얼마나 정확하며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궁금함이 내 안에서도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다. 체제를 이용하면서 체제를 인정하는 존재로 살다 갈 것인가, 아니면 체제의 영향력에서 떠나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 것인가, 얼마만큼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나 하는 문제는 나를 비롯한 많은 인간의 평생의 주제이기도 할 것이다.

문단이 진즉 자신에 대해 그러고 있는 것처럼 자기 역시 자신에 대해 '싫증'이 난 로맹 가리는 충만한 여러 가지 삶을 다룬 자신의 책들 뒤에서, "절대적인 허무와 무력감, 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 그리고 말로만 하는 절대에 대한 취미를 잃어버렸다". 그러니 보통, 의식을 몸으로 따라 잡을 수 있는 비범한 인간들의 평범한 습성이기도 한 '다양성에의 유혹'을 로맹 가리가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잘 이해가 간다. 결국 로맹 가리는 '새로 시작하는 것, 다른 존재로 사는 것'에 대한 유혹을 타고 넘었다. '항상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서로 모순된 나의 충동들은 나를 어디로 튈지 모르게 만들었고, 나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자기 앞의 생>에 대한 문단의 열광과 공쿠르상 수상 지목으로 인해 그 모험은 대성공을 하고 로맹 가리는 "한계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갖게" 되었다. "이 세상에 새로 태어난 나는 주목 받지도 않고 유명하지도 않은 나의 두 번째 삶의 방관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드러나지 않은 <자기 앞의 생>과 이미 공쿠르 상을 수상한 바 있는 프랑스 당대 최고의 작가인 로맹 가리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평론가들은, 이전의 책들에서 그렇게 많은 문장과 문체의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맹 가리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다" "로맹 가리는 끝난 작가다.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결국 죽음과 함께 사실을 밝히는 순간까지 로맹 가리는 새로운 삶이라는 환희를 맛보면서 두 작가 사이의 루머를 요리하는 쾌감으로 감각과 지성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 앞의 생>과 몇 작품을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한 로맹 가리가 두 작가 사이의 상관관계를 단호하게 부정했던 평론가와 기자들을 보면서 살았던 그 시간들은, 로맹 가리가 만든 '몰래 카메라'에 프랑스의 문단 사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실 가공스럽기도 한 세월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몰래 카메라에 드러난 평론가와 기자들의 허위와 무능함과 독선은 소름 돋는 코미디이기도 한데, 혹시 사실이 밝혀진 이후 어떻게 그들이 전문가적 권위와 체면을 유지하면서 살았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로맹 가리의 욕구와 자유는 온전하며 완전한가?

로맹 가리의 목적은 지식인들 전문가들의 허위와 무능력함과 무지를 드러내는 데 물론 있지 않았다. 20대부터 비행사와 외교관으로 이미 성공했고 작가로서도 너무도 유명해진 로맹 가리는 "사람들이 그에게 만들어 준 얼굴" -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 을 가지고는 자기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것이 호평이든 혹평이든 불문하고.

자아를 상실하고 삶의 궁극적 쾌감을 잃은 노인의 괴팍한 모험에서 비롯되었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다시 확인 받고 싶었던 천재 작가의 인간적 욕구의 극단적 발산이었건 분명한 것은 로맹 가리는 작가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맹 가리는 자기의 욕구를 바라보면서 작가의 본질을 새삼 꿰뚫게 되었을 것이다.

그 욕구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나의 꿈은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실컷 쓰고 내 생전에는 출판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표현의 욕구의 순수함은 다른 어떠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영향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절실한 외침으로 나에게 이해된다.

"작가는 그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더 이상 아무도 신경 쓸 일이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받아 마땅한 몫을 돌려받게 된다"고 믿은 로맹 가리가 사후에나 이루어질 법한 일을 자신의 생전에 경험한다는 것은 자기 말대로 얼마나 "통쾌한" 일인지.

그러나 내가 로맹 가리 이야기에서 얻은 공감과 카타르시스는 앞에 말한 것처럼 본능적이라 여겨지는 인간의 욕구를,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나 본질과는 무관한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어떻게 과감하게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의식을 제대로 만났다는 것이다. 자신의 순수 의지에 집중할 수 있는 한 인간이 벌인 놀라운 모험과 소설적인 파국이 '내 눈 앞에서' 전개되었던 것도 내 인생의 '대단한'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로맹 가리의 인생을 보면서 소설과 현실에는 구분이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인간의 삶은 느끼는 만큼, 또 지탱하고 실현하는 만큼 파격적이며 충만하다. 그러니 소설에 대해 안일한 쾌감을 가지는 것이나 혹은, 현실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못 되는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그가 자살의 이유처럼 말했던, "문학이 오랜 동안 인간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해 왔다고 자부했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했지만 더 이상 그런 정열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에 다시 생각할 여지를 갖게 한다. 열정이 없어졌다는 것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떤 사람의 존재함, 그리고 활동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은 그의 열정과 에너지를 인정하려 하지만, 영혼에서인지 아니면 가슴에서인지, 혹은 살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던 열정의 소진을 간파해낼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그 자신만인 것이다.

그러나 로맹 가리는 문학과 자신을 통해 인간의 문제와 욕구를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대변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만들어준 얼굴"은 어디 작가나 연예인들, 그리고 유명인들만 가지고 있는가?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 하고 싶은 욕구와 그 무상함을 모르지 않은 내면의 소리가 날이 날마다 부닥치면서 사는 사람에게 어느 하루, 로맹 가리의 이야기가 불현듯 들어왔다. 오늘은 인터넷 서점에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주문했다.

덧붙이는 글 | 자기 앞의 생 (양장)
에밀 아자르 저/용경식 역 | 문학동네 | 2003년 05월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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