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지난 21일 오후, 임진각에서 경기도 주최로 9월 11일까지 열리는 세계평화축전을 찾아가는 길. 오랜만에 스쳐가는 경의선 창밖의 풍경이 호젓했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품지 않았다. 그간 경험으로 관(官)에서 치르는 행사나 축제는 '거기서 거기'일 거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임진각 평화누리에 도착했을 때 그 편견을 깨야 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의 목청과 길 잃은 아이의 눈물 섞인 울음을 예상했지만 행사장은 번잡하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았다. 휴일을 맞아 적지 않은 인원이 행사장을 찾았지만 모두들 동네 공원에 나온 듯 천천히 거니는 모습은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추상적 평화를 구체적 감흥으로
"일반 축제와는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6주의 기간에 '평화'라는 다소 추상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기에 전쟁과 기아 등 '뻔한' 여타의 행사를 닮지 않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굳이 갈등과 반목을 거치지 않더라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한다면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물 위에 떠 있는 찻집에서 만난 축제의 총감독 강준혁(58·공연기획가)씨는 작년 4월부터 준비해 왔다며 프로그램들이 다루는 내용들도 '존중과 배려'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어쨌건 돈이 드는 일이었던 만큼 '일회성'이 아닌 영원히 남길 수 있는 휴식처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생명촛불 파빌리온은 인터넷으로 초를 사서 켜 두는 것입니다. 마음의 사람을 위해 초를 켜고 그에게 이메일 등을 통해 알려 주는 것이죠. 물론 실제 이곳에서 초가 켜집니다. 수익금은 유니세프에 전액 기부되며 그 중 일부는 북한 어린이를 위해 사용됩니다."
분야가 다른 기술들을 접목 시키고 스태프에게 이해를 시키는 여러 과정 등 준비의 노곤함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평범한 논이었던 곳이 '음악의 언덕'으로 변해 많은 이들이 함께 즐기는 모습에서 그간의 피로를 잊게 된다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혹 행사를 지자체장의 행보와 거론지어 오해를 하는 일은 없냐고 묻자 애매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 많았죠. 적어도 한 번 와 보고 평가해 주었으면 합니다. 프로그램들 모두 정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안타깝고 억울하더군요."
만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 펼쳐지다
바깥으로 나서자 여러 목가적 그림이 다가왔다. 3000여 개의 바람개비가 꽂혀 있는 언덕에서 아이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었고, 한 쪽 공연장에선 잔디밭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편하게 앉은 이들이 음악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부문화와 공간적 하드웨어를 함께 이끌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축제죠. 사실 관(官)에서 주최했지만 개막식조차도 안 했거든요. 혈세로 하는 행사 아닙니까. 결국 국민들에게 남겨지는 장소가 되는 겁니다."
축제의 여러 장소를 소개하던 오동식 홍보팀장은 "한 번 찾은 사람은 주위 친구나 친지의 손을 잡고 꼭 다시 오게 된다"며 온 가족이 함께 하는 공연장인 동시에 휴식 공간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꼭 그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여러 구조물과 공간들은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내던 이상향의 마을 모습을 닮아 있었다. 거기에 모래장난 삼매경에 빠지고, 자신들의 손으로 짓고 색칠한 집에서 활짝 이를 드러낸 아이들의 모습은 충분히 평화 그 자체였다.
이야기와 경치를 즐기다 보니 30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는 '통일기원 돌무지' 앞에 이르게 됐다. 현장이나 온라인으로 신청 받은 메시지를 음각해서 기둥에 붙이게 된다고 하며 수익금은 북한의 결핵 아동을 위해 쓰인다고 한다.
세계평화축전, 있는 그대로를 봐 달라
행사장을 둘러본 후 진행본부에서 상종열 기획부장을 만났다. 그는 차분하게 평화축전의 의의에 대해, 그리고 '있는 그대로' 봐 주지 않는 시각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행사 진행은 잘 되는가?
"8월 1일에 시작해 주말엔 많이들 오셨다. 하지만 휴가와 광복절이 있는 영향을 솔직히 받았다. 좋아 질 것이다. 거리가 먼 탓도 있긴 하다."
- 파빌리온과 돌무지 등 기부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은?
"ARS도 그렇고 모든 기부에 있어 대중적 접근은 천 원 단위다. 가격을 만 원으로 책정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 조금 힘든 면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기부에 대한 태도가 다소 머뭇거리는 면이 있는 것 같다. 향후 이 부분에 있어 조금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 임진각에서 세계평화축전을 갖는 의미에 대해.
"임진각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많이 떨어져 있다. 하지만 이곳은 통일의 시대 징검다리로 노둣돌을 놓아 가야 하는 곳이다. 앞으로 임진각에서 더욱 다양한 스펙트럼의 일들이 열릴 것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평화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펼쳐 가는 곳이 되어야 한다. 올해보다 더욱 나아지는 임진각, 평화누리가 될 것이다."
- 일부 언론에서 지자체 행사에 있어 누가 누구보다 '재미'를 더 보고 못 보았다는 식의 정치적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기획자가 가지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물을 펼쳐 놓았을 때는 모든 이들의 공감, 즉 느낌표를 얻어야 한다. 평화축전이 경기도에서 주최하는 것은 분명하다. 개연성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정치가 느껴지는가(웃음)?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좀 더 자유로운 생각들을 해 주면 좋을 것 같다. 고사리 손으로 촛불을 켜는 아이들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순수한 평화의 장으로서 임진각이 존재해야 한다."
행사장을 돌아 나오는 길, 서늘한 바람 아래 신문이나 돗자리를 깔고 그대로 누워 버린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문득 그렇게 편한 모습으로 각기 다양한 상상을 떠올릴 수 있는 것 자체가 사실은 '평화'의 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