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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으로 며칠 내버려두었더니 쑥쑥 올라온 상추 꽃대는 방사형으로 가지를 내었고 그 가지의 끝마다 물에 불은 쌀알 크기만한 연두색 꽃봉오리가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앙다문 그 입이 열리고 작고 앙증맞은 노란 상추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따갑게 느껴지는 한낮의 햇빛이 그 예각을 좀 누그러뜨린 어느 날, 저 노란 상추꽃이 진 자리에 가을이 알알이 맺히리라.
그렇게 씨앗으로 맺힐 가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들깨도 마찬가지다. 샐비어꽃처럼 돋아난 꽃대의 수많은 방안에 종(鐘)처럼 들어앉은 하얀 들깨꽃이 피었다. 상추꽃과는 달리 특유의 고소하고도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들깨꽃 향기는 종소리처럼 퍼져나가 멀리 서 있는 내 코에까지 와닿는다.
그 향기에 이끌려 들깨 앞에 쪼그려 앉는다. 하얀 꽃들이 벌써 밥튀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있다. 하얀 종을 잃어버려 종대(鐘臺)는 비었지만 오히려 빈자리의 향기가 더 진하다. 그 빈 종대에 곧 하얀 종소리보다 더 향기롭고 그윽한 까만 침묵들이 빼곡하게 들어차리라. 가을이 좀 더 깊어지면.
3.
한여름이 지나고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씨앗을 품기 위하여 꽃을 피워내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벌써부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씨앗을 그 안에 품는 채소들도 있다. 호박과 고추가 바로 그들이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고추는 아직도 싱싱한 초록을 자랑하고 있다. 잎도 푸르고 뻗어나간 고춧대가 휘청할 정도로 매달린 고추들도 푸른 색 일색이다. 아직도 부지런히 꽃을 피워내고 꽃 진 자리에 갓난아기의 손가락만한 아기 고추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고추에게는 가을은 아직 먼 모양이다.
덕택에 이번 여름에 고추는 원 없이 먹었다. 아내는 겨울용 반찬으로 먹기 위하여 간장과 식초를 넣은 병에 고추를 넣어 만드는 고추장아찌를 네 병이나 담가 놓았다.
호박 농사는 이와 달리 흉작이다. 맨 처음에 수정된 호박을 빼고는 결실이 없다. 암꽃들은 수정이 되었어도 좀처럼 크게 자라나지를 못하고 어떤 암꽃들은 피어나지도 못한 채 시들고 말았다. 땅이 거름지지 못한 때문이리라. 아는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어 호박죽 잔치를 벌이려고 했던 처음의 부푼 꿈은 아무래도 접어야 할 것 같다.
꿈을 접고 며칠 전에 처음 결실을 맺은 호박을 수확했다. 저울에 달아보니 3kg. 이 둥그런 호박 속에 한여름 햇빛이 가득 차 있을 터이다. 요즘 그 열기를 식히려고 식탁에서 말리고 있는 중이다. 가을이 제법 깊어졌을 무렵, 노랗게 익은 그 한여름을 꺼내 되직한 호박죽을 끓여 가족들과 이웃들과 함께 나눠 먹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