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권준영(27)씨는 2004년 6월 호주에 입국, 시드니에서 6개월간 영어공부를 한 뒤 퀸즐랜드 주 번더버그의 고구마농장에서 일했다.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는 한국, 영국, 캐나다, 일본 출신 등 다양한데 트랙터로 고구마 밭을 갈아주면 플라스틱 바구니에 고구마를 주워 담고, 포장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시간당 12.50 호주달러(한화 1만원). 보통 하루 8~10시간씩 일하고 대략 90~120 호주달러를 번다. 그 정도 수준으로 1주일에 5일씩만 일하면 숙식비용 200달러를 제하고도 약 30달러 정도를 저축할 수 있어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권씨는 5주 만에 1400달러(약 112만원)를 모아 친구들과 멜버른, 캔버라 등으로 여행을 떠났다.
2004년 11월에 호주로 온 김우영(25)씨는 독립심이 강한 자립형 청년이다. 대학에 다니다가 군복무를 마친 뒤 과자상자를 날라서 번 돈으로 호주로 오는 비행기 삯을 마련했다.
그는 지금도 건축현장에서 페인팅과 샌딩 등의 보조로 일하고 있다. 시쳇말로 '노가다'인 셈이다. 처음엔 버스조립공장에서 주급 960호주달러(약 77만원)를 받고 일했지만 영어 때문에 3주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시드니 시내의 아파트에서 한국인 4명, 헝가리 출신 2명, 슬로바키아 출신 1명, 일본 출신 1명 등과 함께 살고 있다.
위 이야기는 이름하야 호주 '워킹홀리데이(외국 젊은이들에게 1년간 특별 비자를 발급하고 취업자격을 주는 제도) 메이커' 들의 생활단면이다.
호주로 향하는 워킹홀리데이 젊은이들
호주는 돈 없는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나라다. 큰 돈을 들여가며 유학 가서 영어를 배울 형편이 안 되거나, 여행경비를 스스로 마련하고자 할 때 가장 문턱이 낮은 곳이 호주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1995년 호주, 1996년 캐나다, 1999년 일본, 뉴질랜드 등과 워킹홀리데이 협정을 맺었다. 이 네 나라 중에서 호주가 원조인 셈인데, 숫자 면에서도 단연 선두다. 다른 세 나라의 숫자를 다 합쳐도 호주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 이유는 호주만 유일하게 쿼터제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호주간 워킹홀리데이는 올해로 10년째다.
한-호 양국의 워킹홀리데이비자(취업관광사증) 협정은 아주 뜻밖의 기회에 성사됐다.
1994년 11월 17일,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APEC회담에 참가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귀국길에 호주를 방문, 당시 폴 키팅 호주총리와의 회담을 가졌는데 이때 폴 키팅 총리가 '한인 불법체류자 부분사면' 등 껄끄러운 양국 현안 협의를 피하기 위해 워킹홀리데이 협정에만 긍정을 표한 것.
어쨌든 1995년 3월, 닉 볼커스 이민부장관이 한국을 방문해 워킹홀리데이 비자협정을 체결하고, 7월1일부터 협정이 발표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호주는 1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한 국가들(약 2만 달러)인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네덜란드, 일본 등 6개국과만 협정을 체결하고 있었다.
호주 이민부에 따르면 2004년 7월부터 2005년 4월까지 9개월 동안 1만3000명의 한국인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입국했다. 1990년대엔 통계조차 없을 정도로 그 숫자가 미미했는데, 2000년 이후에만 3만2000명이 호주로 왔다고 하니 가히 '워킹홀리데이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한국청년들의 주요한 해외체험창구가 된 워킹홀리데이비자의 특성은 18~28세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일생에 딱 한 번씩만 발급된다는 것이다. 또한 체류기간 1년 중에서 3개월 동안만 일을 할 수 있고, 나머지기간은 여행을 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한편 2005년 11월부터는 농장에서 3개월 동안 일한 사람에 한해서 체류기간을 2년으로 연장해준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 되기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되기 위해 호주를 찾는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거주하는 시드니 <주안교회>나 <형제사랑교회> 등으로 몰려든다.
<주안교회> 예배장소는 UTS대학교 도서관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본당이 아니라 임시예배장소로 마련된 곳이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와 유학생들이 대부분 타운홀 반경 2km일대에 거주하기 때문. 이 곳에서는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간의 교류는 물론, 한국식 식사도 제공된다.
주안교회 최한영(35) 집사는 "그들은 차비를 아끼기 위해서 2km 안쪽의 거리는 걸어서 다닌다"며 "다들 귀하게 자란 청년들인데 외국에 나와서 알뜰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고 말했다.
번 돈은 아끼고, 생활비는 줄이려다보니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의 숙소에서는 대부분 남녀가 같이 지낸다. 김우영씨의 숙소에도 여성이 3명 포함돼 있다. 그렇다보니 워킹홀리데이 커플도 심심치 않게 탄생한다.
지난 1998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입국한 바 있는 김대형(30)씨는 2004년 8월 학생비자를 얻어서 다시 호주에 온 케이스다. 물론 호주가 처음인 김숙희씨는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다. 그들은 둘 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의 신분으로 일본에서 만나 결혼한 워킹홀리데이 커플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성매매를?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호주 워킹홀리데이가 활성화되다 보니 문제점도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욕심을 낸 젊은이가 과로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거나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입국한 일부 한국여성들이 성매매업소에서 일한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것.
| | 호주의 잭커루족과 한국의 워킹홀리데이 | | | |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우리의 옛말은 호주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무리 부잣집 자녀라 해도 18살이 되면 대부분 집을 나와서 독립한다. 설령 그냥 집에 머무는 '캥거루족'이 된다고 해도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서 자기 몫의 주거비용과 생활비를 부담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호주 젊은이들은 방학을 이용해서 '잭카루(Jackaroo, 호주청소년이 목동이 되는 체험)'가 되어 농촌지역으로 떠도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해외여행이 쉬워진 후로는 농촌지역 대신 해외로 나가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배낭여행을 체험하는 추세다.
그러나 한국청년들이 '돈벌이>영어공부>여행'의 순으로 워킹홀리데이를 활용하는 반면, 호주청년들은 여행>돈벌이 순으로 잭커루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돈도 중요하지만 여행의 가치가 훨씬 클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의 1년이라는 시간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게 호주청년들의 이유다. | | | | | |
특히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한국여성들의 문제는 한국과 호주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한국에서 성매매금지법이 통과되면서 갈 곳이 없어진 일부 성매매업종사자들이 비교적 쉽게 취득할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얻어서 호주로 입국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호주의 경우, 성매매가 합법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면서 3개월 동안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호주에도 성노예방지법이 있지만 호주 경찰들은 성노예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작년에 시드니에 위치한 성매매업소 현장에서 체포된 한국여성 일부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내보이면서 합법을 주장하기도 했다. 호주통신(AAP)은 그동안 태국 등 동남아 여성들이 주를 이루었던 호주 성매매업소 종사자들이 한국인으로 바뀌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호주와 워킹홀리데이 비자협정을 맺지 않은 동남아국가 출신 여성들은 단속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서 입국한 한국여성들이 성매매업자들의 타깃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젊음과 패기가 있다면 배낭을 메라
지구촌이나 세계인이라는 말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구전체가 리얼타임으로 연결되고 있지만 지금도 막상 해외로 나가서 견문을 넓히는 일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취지만 제대로 살린다면 워킹홀리데이는 이를 경험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한적한 외국 해변의 야외카페에서 접시를 닦고 불볕더위 속에서 과일을 따는 일을 젊은 시절에 경험해보지 않으면 또 언제 하겠는가. 그렇게 번 돈으로 홀연히 길 떠나며 세계를 정복하는 젊은이들은 아름답다. 호주로 향하는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등에 멘 배낭이 가벼운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젊음과 패기는 필수다."
덧붙이는 글 | 기사의 일부는 <신동아>에 연재하고 있는 '윤필립 시인의 시드니 통신'과 중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