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애 여사의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바다출판사)를 읽었다. 이 분의 책을 고른 계기는 순전히 그이의 아들 때문이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바람난 가족> 그리고 <그때 그사람>를 만든 감독이 고 여사의 아들이었다.
도대체 어떤 엄마이기에 이렇게 인습에 찌들지 않은 아들을 낳을 수 있었을까? 참으로 궁금했다. 난 <바람난 가족>을 보면서 그 발칙 시원한 내용 전개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그 영화에서 어떤 자유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무튼 임상수 감독 때문에 혹시 남들이 모르는 임상수 감독의 어린시절 한 자락이라도 엿볼 수 있을까 해서 고 여사의 책을 샀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후 내 마음에는 임 감독에 대한 자잘한 호기심 따위는 오간데 없고 오로지 고광애 여사에 대한 존경심만이 와르르 밀려왔다. 이렇게 몸과 마음 다 멋진 노년을 살고 계시는 분이 있었구나.
사실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를 읽기 전 까지 나는 노인분들은 그냥 내 어른이건 남의 어른이건 떠올리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당신들 스스로 알아서 노년설계 좀 잘하면 안 되나, 제발 불쌍한 표정 좀 짓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내 심정이었다.
그리고 세금은 얼마든지 낼 터이니 복지부는 더 이상 '가족타령'하지 말고 노인복지의 청사진이나 좀 내걸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었다. 한마디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인 분들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다.
고 여사가 책에서도 밝혔듯이 하나의 예로, 나 또한 평소 버스 같은 데서 노인 분들이 가까이 오면 피하기 일쑤였다. 겉으로는 자리양보였으나 속으로는 혹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버릇없다 책잡히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고 혹은 무시하며 피하기 일쑤였다.
허걱! 그런데 노인 분들은 그런 젊은 사람들의 태도를 다 느끼시고 섭섭하면서도 다 참고 계신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부끄러워라.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이전의 그런 내 모습을 반성했으며 더 이상 그런 몰염치한 행동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는 노년의 필독서다. 아니 노년만이 아니라 중년의 필독서기도 하다. 이 한 권을 읽고 노년을 보내는 것과 안 읽고 보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노년생활의 알파와 오메가가 다 들어 있다.
고 여사는 늙어서 중요한 것으로 경제력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경제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고 하였다. '회심'의 마음. 즉, 노년의 마음을 그대로 우기기보다 마음 한번 달리 먹어보거나 돌려 생각하다 보면 '섭섭하다' 소리만 늘어놓는 늙은이는 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어디 마음가짐 뿐인가. 늙어서 해야 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홀로 지내는 연습이라든가, 자식과 제대로 이별하기, 효도란 이름으로 자식들 못살게 굴지 않기, 아프다 소리 입에 달고 살지 않기 등 노년의 '일정'은 너무 빡빡했다.
고물 자동차처럼 갈수록 쇠락해 가는 몸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질병과 친구하는 마음과 함께 질병에 대한 정보 습득과 예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백번 옳으신 말씀.
또 의학의 발달로 노년이 길어지다 보니 그에 파생되는 노년의 사랑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부분. 고 여사는 노년의 성공한 재혼과 실패한 재혼의 사례를 들어가며 현명한 선택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이별 준비'. 고 여사는 '불쌍하고 부끄럽고 불안한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의연히 맞이하기 위하여 다소 긴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죽음을 침착하게 준비하다 보면 노년의 삶은 여유로워진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죽고 난 다음 자식들이 행여 돈으로 형제간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유산분배는 미리미리 정신 맑을 때 '자필유언장으로 공증'해두도록 당부한다.
이 책은 노년에 대한 준비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노년도 노년이지만 현재 내가 우선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던져준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노년에 국한되기보다 누구나 한번 쯤 읽어볼 필요가 있는 '삶의 필독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