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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의 노란 속에는 지난 여름의 햇빛이 가득 담겨 있다
호박의 노란 속에는 지난 여름의 햇빛이 가득 담겨 있다 ⓒ 정철용
호박의 씨를 덜어내고 껍질을 벗겨낸 후 작은 조각으로 잘라 큰 냄비 안에 차곡차곡 쟁여주는 것으로 내 임무는 끝났다. 바통을 이어받은 아내는 한 시간만에 잘 익은 그 노란 호박 속을 끓여 맛난 호박죽을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색깔도 너무 고왔지만 한 입 떠먹어 맛을 보니, 그 맛이 가히 예술이었다. 지난 여름 우리 집 텃밭에 눈부시게 쏟아져 내려 호박을 길러낸 햇빛의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여름내 울어대던 매미 울음소리도 어디선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호박죽에는 눈부신 여름 햇빛의 달콤한 맛이 스며 있다
호박죽에는 눈부신 여름 햇빛의 달콤한 맛이 스며 있다 ⓒ 정철용
호박죽에 담겨 있는 햇빛의 맛을 혀끝으로 음미하면서, 그리고 환청처럼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를 귓바퀴 안쪽으로 모으면서, 나는 애간장을 태우며 호박을 기르던 날들을 떠올렸다. 평생 처음으로 내 손으로 키워보는 호박은 큰 기쁨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만큼 안타까움을 안겨주기도 했던 것이다.

2.

우리 집 안뜰의 텃밭에서 평소에 보지 못했던 어린 싹이 하나 돋아난 것을 발견한 것은 늦봄의 어느 날. 얼마 전에 심은 고추 모종이 잘 자라도록 김을 매주다가 눈에 띈 그 싹은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잡초들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아내와 나는 일단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그냥 두고 살펴보기로 했다.

하루 이틀 지나 내 엄지손톱 크기만큼 자라난 둥그런 떡잎을 보고, 우리는 이건 필시 오이나 호박 아니면 콩과식물의 한 종류일 거라 생각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텃밭에 물을 줄 때마다 그 미지의 어린 식물을 주시했다. 봄이 끝나갈 무렵 그 어린 식물은 크고 넓은 잎사귀로 드디어 그 본색을 드러냈다.

고춧대 사이로 길을 내는 호박 덩굴의 커다란 호박잎이 싱싱하다
고춧대 사이로 길을 내는 호박 덩굴의 커다란 호박잎이 싱싱하다 ⓒ 정철용
호박이었다. 씨앗을 뿌리지도 않았는데 우리 집 텃밭에 저절로 싹이 튼 호박이 신기했다. 아마도 우리 집 텃밭에 찾아온 새가 실례한 배설물에 운 좋게도 호박씨가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아내와 나는 말 그대로 덩굴째 굴러 들어온 호박을 차지한 마음이 들어 몹시 기뻐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물을 주며 정성을 쏟았다.

호박 덩굴은 하루가 다르게 크게 자라나 그 옆에 자라고 있는 고추와 들깨의 자리마저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내 얼굴보다도 더 큰 호박잎들이 덩굴마다 여러 장 달렸다. 그 커다란 호박잎들이 여러 장 시드는 사이에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노란 호박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의 부푼 기대도 함께 피어났다.

호박꽃은 졌어도 열매가 매달리지 않아 나는 슬펐다
호박꽃은 졌어도 열매가 매달리지 않아 나는 슬펐다 ⓒ 정철용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커다란 호박잎들 사이에 숨어 핀 노란 호박꽃들이 벌써 몇 송이나 피고 졌는데도, 호박 열매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벌들이 분주하게 드나드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기에 분명 결실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누렇게 시든 호박꽃들은 둥근 호박 열매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텃밭 앞에 쪼그려 앉아 나는 커다란 호박잎을 들추고 시든 호박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더러운 물에 젖었다가 바짝 마른 누런 화장지처럼 꽃대에 말라붙어 있는 죽은 호박꽃들이 안타까웠다.

둥글고 매끈한 호박 열매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저 호박꽃들의 운명이란 얼마나 슬픈 것이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어 가는 호박꽃들 앞에서 나는 슬펐다. 이런 나의 슬픔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박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호박꽃 암꽃은 꽃받침 아래 작은 구슬만한 씨방이 혹처럼 매달려 있다
호박꽃 암꽃은 꽃받침 아래 작은 구슬만한 씨방이 혹처럼 매달려 있다 ⓒ 정철용

호박꽃 암꽃의 암술은 오무린 아기 손가락 같은 귀여운 모습이다
호박꽃 암꽃의 암술은 오무린 아기 손가락 같은 귀여운 모습이다 ⓒ 정철용
어느 날 보니 그동안 피고 졌던 호박꽃들과는 달리 꽃받침 아래 작은 구슬 크기 만한 동그란 혹이 달린 호박꽃이 눈에 띄었다. 암꽃이었다. 호박꽃의 암꽃과 수꽃은 피어나는 시기가 조금 차이가 난다는데, 비로소 암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암꽃은 꽃받침 아래 혹처럼 매달고 있는 씨방만 다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수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수꽃이 덩굴에서 길쭉하게 꽃대를 뻗어 올려 꽃을 피우고 꽃의 안쪽에 창끝처럼 삐죽하게 수술을 내밀고 있는 반면에 암꽃은 덩굴에 바짝 붙어서 피어나고 꽃의 안쪽도 아기의 오무린 손가락 같은 여섯 개의 암술이 동그랗게 모여 있는 모습이었다.

호박꽃 수꽃은 덩굴에서 길쭉하게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다
호박꽃 수꽃은 덩굴에서 길쭉하게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다 ⓒ 정철용

호박꽃 수꽃의 수술은 창처럼 뾰족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호박꽃 수꽃의 수술은 창처럼 뾰족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 정철용
아내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동안 피고 진 수꽃에 호박 열매가 매달리지 않았다고 슬퍼했으니…. 푸풋, 웃음이 나왔다. 동그란 혹이 매달린 암꽃들이 다투어 피어나자 우리의 기대는 다시 부풀어올랐다. 이제 저 암꽃들이 지고 나면 꽃받침 아래 동그란 씨방들이 부풀어오르면서 모두 커다란 호박 열매로 자라나리라.

하지만 우리의 부푼 기대는 또 다시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 처음으로 수정된 암꽃은 씨방이 둥글게 부풀어올라 우리의 기대에 보답했지만, 그 이후에 수정된 암꽃들의 씨방은 하나같이 조금 자라나다 말 뿐 큰 호박 열매로는 자라나지 못했던 것이다. 새까맣게 썩어 들어가는 어린 호박 열매 앞에서 우리는 슬펐다.

그게 영양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한 덩굴에 몇 개씩 매달린 호박 열매를 부양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집 텃밭이 기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거름 한 번 주지 않은 채, 수정되어 덩굴에 매달린 어린 호박 열매는 모두 탐했으니, 아 우리는 얼마나 욕심 사나운 사람들이었던가!

수정되어 매달린 어린 호박이 크게 자라기 위해서는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다
수정되어 매달린 어린 호박이 크게 자라기 위해서는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다 ⓒ 정철용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에야 우리는 뒤늦게 욕심을 버렸다. 어지럽게 뻗어나간 잔 덩굴들을 정리해주고 잔디밭 쪽으로 한없이 뻗어나가고 있는 중심 덩굴의 더듬이 부분을 잘라주었다. 뿌리에서 힘겹게 길어 올린 영양분들이 수정되어 막 살이 오르고 있는 어린 호박 열매에 집중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해서 여름의 뜨거운 햇빛이 다하기 전에 우리는 두 개의 호박을 수확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피어난 암꽃의 수를 열심히 세어가면서 열 개 아니 스무 개 이상의 호박을 수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즐거워했던 처음의 부푼 기대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초라한 수확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가 수확한 것은 호박 두 개에 불과했지만 호박꽃을 통하여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삶의 진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모든 꽃들이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고 모든 꽃들이 씨앗을 품지도 못한다는 진실을. 삶에는 욕심을 버려야만 결실이 있는 경우도 많은 법이라고.

3.

그렇게 수확한 두 개의 호박을 우리는 모두 호박죽을 해먹었다. 하나는 수확하자마자 궁금한 마음에 바로 호박죽을 만들어 먹었고 또 하나는 며칠 전에 호박죽을 해서 먹은 것이다. 호박죽을 다 끓여놓고 보니 세 식구뿐인 단촐한 우리 가족이 먹기에는 너무 양이 많았다.

그래서 첫 호박죽은 이웃집에 한 대접 나눠주고 우리가 매주 찾아 뵙는 빅토리아 할머니 댁에도 듬뿍 나눠주었다. 며칠 전에 만든 호박죽은 냉장고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주말에 우리 집에 초대한 손님들에게 후식으로 한 그릇씩 대접했다. 모두들 너무나 맛있다며 잘 먹어서 몹시 기뻤다.

우리가 수확한 것은 단지 호박 두 개였지만 그보다 더 값진 깨달음을 배웠다
우리가 수확한 것은 단지 호박 두 개였지만 그보다 더 값진 깨달음을 배웠다 ⓒ 정철용
공들여 어렵사리 수확한 귀한 호박으로 만든 호박죽이고 또 그 맛이 기가 막힐 정도로 맛이 있으니 이웃들과 손님들과 나누어 먹는 것이 조금은 아깝게도 여겨지겠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도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호박꽃을 통해 배운 귀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난 여름, 못 생긴 꽃의 대명사인 호박꽃으로부터 우리는 귀중한 삶의 지혜를 배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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