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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선대에서 반지 찾기
몽선대에서 반지 찾기 ⓒ 정수권

"반지 주세요."
"엉? 맞다! 근데 반지가 …."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얼른 빨래가 담긴 대야 속에서 바지를 쳐들고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황급히 아내가 빨래하던 곳에 가보니 졸졸 물만 흐르고 있었다. 아이쿠! 큰일 났다. 반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22년 전의 여름휴가는 그렇게 시작됐다.

형님 덕에 결혼하고 은혜 갚으러 떠난 휴가

1983년 아내와 나는 여름휴가를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가기로 했다. 장가를 보내준 시골 형님의 농사일을 조금 거들어줘야 도리일 것 같아 아내와 상의 끝에 결정한 것이다. 나는 그 전 해 11월에 결혼했다.

당시 백수였던 나는 모든 살림을 맡아하고 있던 형님에게 모든 결혼식 비용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출가하여 대구에 사는 누님까지 나서서 "촌놈 동생이 도시의 예쁜(?) 색시를 데려오는데 반지 정도는 확실히 해줘야 한다"면서 형님에게 압력을 넣어 - 지금 보면 좀 촌스러운 모양이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유행했던 -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맞추게 됐다. 누님 덕에 형님 도움으로 다이아 반지를 갖게됐으니 나로선 행복할 따름이었다.

고향의 여름아침은 일찍 밝았다. 형님 일을 거들고 난 뒤 마을 앞 냇가에 있는 몽선대(夢仙臺)에 가기로 했다. 아내는 어머니와 함께 점심준비를 시작했고, 나는 형님과 형수님을 따라 고추밭으로 고추를 따러갔다.

널따란 고추밭에 고추가 발갛게 익어 있었다. 한여름의 햇살은 아침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한 시간정도 지나자 옷은 벌써 땀으로 흠뻑 젖었고 따가운 햇볕이 등짝을 사정없이 문질러댔다. 연신 헉헉거리며 물주전자만 들이키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형수님이 들어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나는 못이기는 척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미안한 마음에 냇가의 고기를 잡아 점심에 매운탕이라도 끓일 생각으로 텐트와 고기잡이 채비를 하니 아내도 빨랫감을 챙겨들고 따라나섰다.

일도 못 돕고 아내 반지만 잃어버리다

몽선대
몽선대 ⓒ 정수권
아내와 나는 신선이 꿈꾸던 곳이라는 몽선대로 향했다. 몽선대는 나무가 울창한 앞산에 둘러싸인 한적한 곳으로, 물도 맑고 주위의 자갈이 깨끗하여 우리 마을 팔경 중 으뜸이다.

도착하니 당시만 해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그런지 조용했다. 아내도 흡족해하며 흐르는 물도 쳐다보고, 손발을 담그기도 하면서 물에 발을 담근 채 빨래를 시작했다. 비누칠을 하다보니 손에 낀 반지가 자꾸 미끄러졌다. 아내는 반지를 빼 내게 건넸다.

나는 가져간 텐트를 물가 잔디위에 쳐놓은 후 바지를 둥둥 걷고 고기잡이 뜰채인 반도를 들고 물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오래전 이곳에서 천렵하던 생각이 절로나 더위도 싹 가셨다. 나는 원래 손재주가 없어 고기 잡는 일도 젬병이다. 늘 친구들이 잡은 고기를 종다래기에 담아 들고 다니는 역할만 하다 보니 고기가 잡힐 리 없었다.

그래도 아내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어 무리하게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 바지가 다 젖어버렸다. 나는 가져간 반바지로 갈아입고 물때 묻은 벗은 바지를 아내에게 줬다. 그 후에도 열심히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겨우 피라미 몇 마리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집으로 갔다가 다시 오기로 하고 대충 챙겨 일어서는데 아내가 맡겨둔 반지를 달라고 했다. 아. 뿔. 싸!

강가를 수십 번 오르내리며 빨래터는 물론 고기를 잡으러 돌아다닌 물속까지 샅샅이 들여다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아내에게 먼저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고기 잡던 반도로 반지가 있을법한 강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퍼담아 올렸다. 나중에는 집에서 삽과 얼개미를 가져와 여기저기를 뒤졌으나 허사였다.

식사를 하라며 아내가 두 번이나 다녀갔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목이 마르면 강물을 마셔가며 해가 질 때까지 모래와 자갈을 퍼다날라 채로 치고 또 쳤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반복했는지 거짓말 좀 보태서 자갈이 산더미를 이루고 강줄기까지 바뀌었다. 하지만 결국엔 지치고 날도 어두워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휴~. 저녁을 먹고 작은방에 풀죽어 앉아있자 속 모르는 어머니께서 우리가 다툰 것으로 아시고 조심스레 물으셨다.

"얘야, 시골이 불편하제?"
"아녜요 어머님."

아내가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쓸쓸한 웃음이 속상해 난 그대로 쓰러져 잤다.

반지 찾아 삼만리

얼마나 잤을까. 빗소리에 잠이 깼다. 밖이 어렴풋이 밝아왔다. 나는 비옷을 챙겨 입고 또다시 그곳으로 갔다. 정말 꼭 찾고 싶었다. 우리 두 사람을 맺어준 결혼반지가 아닌가.

밤새 내린 비로 강물은 불어있었다. 나는 다시 강바닥을 파기 시작했지만 물이 점점 흙빛으로 변해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집으로 돌아왔다. 옷이 흠뻑 젖은 나를 보며 식구들은 새벽바람에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난 여기저기 마을을 돌아다녔다며 얼버무렸다. 비가 오니 형님 내외분도 들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쉬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아내의 반지
아내의 반지 ⓒ 정수권
부모님과 형님에게는 비가 와서 다른 곳으로 피서를 간다고 둘러대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동구 밖 버스정류장에 형수님이 이것저것 챙긴 보따리를 들고 따라 나오셨다. 버스가 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망설이던 나는 형수님에게 속을 털어놨다.

"형수님, 실은 아내반지를 잃어버렸어요."
"네? 저런, 이걸 어째요?"

형수님도 안타까워 했다. 아내가 빨래하던 곳을 대충 알려드렸다. 대구까지 버스를 타고 오면서 우린 말이 없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반지를 괜히 끼고 갔다고 후회했고, 나는 나대로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자책했다.

집에 와서도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나는 반지를 찾는 꿈까지 꿨다.

며칠 뒤, 반지가 돌아왔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반지사건도 잊혀져갈 즈음, 아침 출근준비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아내가 받았다.

"네? 정말입니까? 그걸 어떻게… 형님, 너무 고마워요."
"뭐? 반지를 찾았다고? 나 좀 바꿔줘."

형수님이 버스정류장에서 나와 나눈 얘기를 부모님과 형님에게 전했는데, 형님께서도 꼭 찾아주고 싶었는지 일하러 들에 나갈 때마다 그곳에 들러 보았단다. 그런지 열흘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날 아침도 그곳에 들러 살펴본 물속 이끼 속에 무언가 희끗거리는 물체가 있어 혹시나 하여 건져보니, 분명 반지인데 처음에는 물때가 끼어있어 반지 같지도 않더라고 했다.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바꿔줬다. 한껏 들뜬 아내가 "네네, 그럼요. 아주버님께 고맙다고 전해주세요"하며 환히 웃었다.

우리는 흔히 어렵거나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기', 혹은 '한강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라는 말로 대신한다. 그처럼 불가능한 일도 소망이 간절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아내가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형님이 한턱내래요."

그해 여름은 시원했다.

덧붙이는 글 | 몽선대는 서석지 연꽃이 아름다운 마을 연당리(경북 영양군 입암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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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주변의 사는 이야기를 따스함과 냉철한 판단으로 기자 윤리 강령을 준수하면서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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