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침묵해야 했던 단종의 비, 정순왕후. 누가 썼건간에 일단 집어들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소재의 소설이었다. 서점에서 발견한 순간, 나는 작가도 확인하지 않고 책을 집어 들었다. 열일곱의 나이에 숙부의 손에 살해당했던 소년왕 단종, 남편의 죽음 이후 육십 년 이상을 살아내고 여든 두 살의 노파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비 정순왕후. 죽은 그녀의 혼백이 저승으로 떠나면서 부르는 길고 애달픈 노래. <영영 이별 영이별>.
집에 돌아와서 작가가 김별아인 것을 확인했을 때 아, 이 책을 사길 잘했구나. 생각했다. 김별아의 단편 <첫사랑>을 읽고 가슴 한 편이 뭉클해졌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내재해있는 여린 향기를 애틋하게 풀어낼 줄 아는 작가. 그녀의 단편 <첫사랑>은 그 후 내가 접해 본 여느 단편도 따라갈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사랑 이야기였다.
그런 그녀가 그려낸 역사소설. 그 누구도 조명을 비추지 않았던 단종비가 주인공인 역사소설. 그러고 보면 단종에 관해서는 수도 없이 많은 소설과 드라마가 만들어졌지만 단종비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시선을 던지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단종보다도 더 통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인물이었을텐데. 나는 2년 전 방문했던 영월의 단종릉, 높은 언덕에 자리했던 곱고 단아한 왕릉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많은 역사 인물과 새롭게 대면했다. 이제껏 알아왔던 역사의 주류들-세조, 세조비 정희왕후, 한명회, 양녕대군 등 소설이며 드라마에서 수없이 만나왔던 인물들을 피해자인 단종비의 시선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단종비가 되어 만난 이들의 면모는 가증스럽고 역겨웠다.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이 탐탁치 않아 왕비 자리를 한사코 사양하다가 못이기는 척 곤위에 올랐다는 정희왕후나 양위를 거듭 사양하는 시늉을 했던 세조, 살생부를 작성하여 사람 죽이는 일을 눈 깜짝 하지 않고 싸늘히 해치워 권력의 핵심이 된 후 두고두고 권세와 영광을 누리다 간 한명회, 친조카를 죽이라고 서슴없이 간했던 양녕대군. 이들의 악함보다 단종비를 더 견딜 수 없게 했던 것이 바로 자신은 악한 일을 할 의도가 없었던 척하는 위선이었다.
얼마 전에 방영되었던 '왕과 비'에 나왔던 세조를 떠올려보았다. 그 드라마에서 세조는 어쩔수 없이 대세에 이끌려 조카를 밀어내고 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그려진다. 나 또한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음, 어쩔 수 없었겠구나. 단종이 너무 약했구나. 그래서 왕위가 위태롭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수 있었겠구나. 어쩌면 세조가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조선이 오백년의 천수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종비의 시선으로 이들을 엄정하게 바라보고 나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단종이 약했던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세조의 탐욕이 단종을 약하게 한 것이 먼저일까. 나라의 혼란이 걱정스러워 왕위에 오른 것일까, 아니면 왕위에 오르기 위해 나라의 혼란을 유발한 것일까. 어쩌면 세조는 북한의 남침 우려를 재탕 삼탕해 먹으며 어린아이의 사탕값까지 모금하여 평화의 댐을 건설했던 전두환과 닮아있지 않을까. 그토록 나는 역사의 강자들이 불러온 노래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깊게, 치밀하게.
작가들, 그 중에서도 소설가들은 무당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처음 그들은 작은 흔적 하나를 붙잡고 인물과 만난다. 그 흔적을 따라가며 상상력과 기교를 가미하여 인물을 창조해가다가 결국 인물에게 신들리게 된다.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혼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상상을 했다. 정순왕후가, 자신의 부박한 삶의 통한을 끝내 잊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다가 몇 백 년의 시간을 넘어와 작가 김별아에게 잠깐 현신하는.
...날로 울울창창해지는 초록이 두려웠습니다. 듬직한 체구와 네모난 큰 얼굴을 지닌 태조 임금과, 살집이 풍부하고 체격이 큰 세종 임금과, 육덕이 좋은데다 짙고 아름다운 수염을 가진 문종 임금을 닮아 유서 깊은 무장가문의 엄장으로 성장하는 당신의 옥체가 안타까웠습니다. 당신은 점차 헌칠한 대장부가 되어가시는데, 도끼 자루를 빼앗긴 처지에서는 미끈한 풍체와 감실감실 돋아 오르는 코밑수염마저도 마냥 반길 수 없는 위태로운 성장의 표지였습니다. 중년의 신왕과 젊은 상왕, 그 어울리지 않는 지위가 기묘하고 아슬아슬하기만 하였습니다...
날로 성장해가는 단종을 바라보는 단종비의 마음을 그린 이 대목은 아무리봐도 김별아가 정순왕후를 상상해가며 쓴 구절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단종비 그 자신의 육성이라고 할 밖에. 날로 장성하여 청년의 몸을 갖게 되어가는 상왕 단종, 그 아름다운 육체를 바라보며 조마조마해 하는 상왕비 정순왕후. 그들이 대면하게 되는 창창한 젊은 날들의 무게가, 그 찬연한 슬픔이, 닥쳐올 것들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이, 읽는 이의 마음에 처연하게 드리워지는 것이다. 나는 손에 땀을 쥐고 읽어나갔다.
...나는 곧 그 곡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지요. 산등성을 타고 흘러내린 나의 울음소리를 들은 아랫마을 여인네들이 나를 따라 동정곡을 하고 있다 하더이다. 그들은 울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울어버리라고 재촉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설움과 한을 담뿍 담아, 나와 함께 울었습니다. 그들이 가슴을 한 번 칠 때마다 나는 내 슬픔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서러운 여인의 일생을 누구보다도 깊이 살며 이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생의 죄업으로 세상에 여자로 나고, 그로도 모자라 반가의 영애가 아닌 상사람의 여식이 되어 부엌데기가 아니라면 드난살이로 한평생을 보내야 하는 저자의 아낙네들이 내게 삶을, 살아내야만 할 이유를 가르쳤습니다...
단종비 정순왕후가 단종의 죽음을 알고 산 속을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울 때 그 주위 마을의 아낙들은 함께 울음으로써 그녀의 영혼에 손을 내민다. 그녀는 약자로서, 비참한 생을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한 자로서 함께 걸어가는 그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삶을 계속 수행해 가야함을 깨닫게 된다. 한 때 왕비였던 여인에게 건네는 민초들의 아름다운 손길. 단종비와 함께 아낙들이 동정곡을 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를 이룬다.
소설가에게 가장 치명적인 재주는 이야기를 '잘 읽히게' 쓰는 재주가 아닐까. 읽고 나서 감동을 받는 소설들의 특징은 일단 '잘 읽힌다'는데 있다. 아무리 좋은 주제, 깨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으면 그 의식을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김별아는 탁월하다. 이 소설은 단종비 정순왕후라는 인물의 독백이라는 형식으로 쓰인, 어쩌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회상록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책장을 넘기면 그대로 끝까지 단숨에 읽게 되는, 물처럼 흘러가는 매끈한 소설이 되었다. 이전 작가들이 미처 시선을 던지지 못했던 '단종비'라는 소재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자기 것으로 만든 김별아의 날카로움과 이야기를 매끈하게 구성해내는 능력이 감탄스럽다.
단종비가 살았던 시대에 비해 현재 여인들의 삶은 얼마나 진보되었는가. 내가 김별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여인이라는 화두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이후 그녀는 소설이나 수필집을 통해 끊임없이 여인인 자신의 삶에 대해 반추한다.
이 소설에서도 단종비라는 인물을 통해 여자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아파하는 작가 김별아를 언뜻언뜻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독자인 나로서는 그 화두를 끈질기게 붙잡고 가는 작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소의 느낌을 맛본다.
작가가 다음에 그려낼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 단종비의 울음을 길게 길게 호흡해낼 수 있는 작가라면 어쩌면 가해자 그룹에 속했던 정희왕후에 대해서도, 다시 말해 강자의 변명도 매끄럽게 소화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아마 나는 강자의 기나긴 변명을 들으며 생각하겠지. 아, 정희왕후는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자기가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들에 대해 그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강자로서 악을 행했던 사람들도 결국 가엾고 초라한 인간이로구나…. 그것이 소설가의 능력일 것이다. 어떠한 얘기를 써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이게 되는. 등장인물의 사연에 그대로 공감하게 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내가 수양대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눈앞에 권력이 보이고, 세상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하여 권세와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어른거린다면. 나는 조카를 죽이고 왕좌에 올라 죄책감으로 밤잠을 설치는 삶을 살다 갔을까? 아니면 차마 그러지 못하여 욕심을 꺾고 대신에 남은 생을 '가질 수 있었던 권력'에 대한 미련으로 몸부림치며 살다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