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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괴감을 가져야 하는가 보다. 자기반성도 해야 하는가 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젯밤 열린우리당 의원들과의 만찬을 하면서 자신의 대연정 제안이 논란이 되는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사고의 틀을 훨씬 뛰어넘는 발상이기 때문에 (논란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수백 년 뒤처진 사고를 가진 백성으로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사고의 틀”을 벗지 못하고 있는 ‘범생’의 입장에서 가슴이 찔리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다.
그 뿐인가. 노 대통령의 발언을 들은 한 열린우리당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의원들이 오늘 감동받지 않는다면 우리 정치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의원들이 정치적 상상력을 동원했으면 좋겠다.” 비록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정치권 동향을 어깨 너머로 늘 보아온 입장이기에 남의 얘기로 치부할 수도 없는 말이다.
상상력을 동원해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사고의 틀을 뛰어넘어보라고 했으니까 일단 시도는 해봐야겠다.
노 대통령이 ‘2선후퇴․임기단축’ 발언을 한 이유는 뭘까? 노 대통령은 ‘2선후퇴․임기단축’의 전제로 “새로운 정치문화와 새로운 시대”를 들었고,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새로운 정치문화와 새로운 시대’가 “선거구제 개편 등 전반적인 정치구조의 극복”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이 지금까지 해왔던 말의 새 버전이라는 얘기다. 선거구제를 개편만 해준다면 한나라당에 권력을 ‘내각제 수준→절반→통째로’ 주겠다던 이전의 얘기를 ‘2선후퇴․임기단축’이란 표현으로 업그레이드한 셈이다.
그러니까 노 대통령이 언급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사고의 틀을 훨씬 뛰어넘는 발상”은 “노선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드는 것이며, 노선에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보다 정치구도 문화가 더 중요하다”는 사고를 뜻하는 것이다. “이념과 노선이 다른 한나라당하고 어떻게 연정을 하느냐”는 식의 사고는 구시대적 고정관념이라는 말이다.
선거구제 개편 발상이 “새로운 정치문화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새 사고라고 하니까 일단 접수하자. 자기반성도 이 지점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선거구제 개편과 개헌은 별개”라는 청와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 둘이 맞닿아있다고 보아온 터이기에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반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 반성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궁금증만 더 커진다. 노 대통령이 자못 비장한 어조로 “정치인생을 마감하고 총정리하는 단계에 들어서서 마지막 봉사를 하려 한다”고 말하면서까지 요구한 선거구제 개편과 연정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딱 하나의 예만 들겠다. 노 대통령은 지난 23일 지방언론사 편집국장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양원제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은 “(현재의 선거구 인구 상하한선 편차가 그대로 가면) 결국 10년쯤 뒤에는 서울서 고등학교 다닌 서울 출신, 말하자면 수도권 출신의 수도권 국회의원이 대한민국 국회를 완전히 지배할 것”이라며 “지역의 이해관계와 가치가 반영될 수 있는 정치구조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이 제시한 것이 “상원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노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선거구제 개편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이유, 즉 지역구도 혁파 의지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절실하다. 지금의 지역구도는 동과 서가 대립하는 양극구조이지만 “수도권 국회의원이 대한민국 국회를 완전히 지배”하는 구도는 노 대통령 스스로 규정했듯이 일극 구조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필생의 과제로 지역구도 해소를 삼고 있다면 수도권 일극 중심의 국회구조도 이참에 예방해야 한다. 더구나 노 대통령이 그런 일극 구조의 도래를 ‘10년 후’로 예상했다면 긴박성은 더욱 크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양원제의 필요성을 이론상의 문제로 제한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말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이 얘기를 잘못 꺼내면 대통령이 양원제 개헌을 주장했다고 돼 버려 곤란”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잡을 수가 없는 건 바로 이것이다. 개헌을 주장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을 극력 거부하는 노 대통령의 태도는 “선거구제 개편과 개헌은 별개”라는 청와대의 설명과 일치한다. 하지만 임기를 제한해서라도 지역구도를 해소하려는 노 대통령의 ‘열정’과 ‘개헌 의혹’을 우려해 지역구도 해소책을 선거구제 개편으로 제한하려는 노 대통령의 방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마지막 봉사’를 하겠다는 마당에, 수백 년 뒤처진 민심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천명한 마당에 세간의 의혹 따위에 신경을 쓸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그래서 자기반성은 유보해야 할 것 같다. 노 대통령이 말한 ‘지금 이 시점’이 언제까지인지, 양원제 개헌 필요성이 적절한 수준에서 제기되는 ‘그 때 그 시점’이 언제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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