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중국 단결출판사에서 출판된 <장아이링 화보집>의 표지 사진.
중국 단결출판사에서 출판된 <장아이링 화보집>의 표지 사진. ⓒ 단결출판사
미국에서의 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아서 그녀는 지독한 가난과 고독과 싸우게 되며 생계를 위해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홍콩의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 그리고 30살 연상인 미국 작가 페르디난드 레이어(Ferdinand Reyher)와 두번째 결혼을 하게 되고 임신도 하지만 스스로 아이를 유산하고 만다. 가족과 떨어진 이국에서 병든 남편을 간병하고 또 힘든 생활고를 홀로 감당해야 했던 장아이링은 그렇게 쓸쓸한 황혼을 맞이하다 생을 마감한다.

"문학은 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지침을 바탕으로 무산계급의 투쟁문학이 주류를 이룬 중국대륙에서 장아이링의 귀족적이고 사치스런 사랑과 가족에 대한 작품들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 타이완과 홍콩에서부터 일기 시작한 이른바 '장아이링 열풍'은 90년대 초 중국대륙에 상륙하게 되고 1995년 그녀의 사망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한번 뜨거운 관심과 연구열풍을 몰고 오게 된다.

장아이링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상하이가 서구적 근대문명과 전통적인 봉건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지점이었다면 현대 중국의 대도시들은 기존의 사회주의적 가치와 개혁 개방 이후 물 밀들이 들이닥친 자본주의적인 상업문명이 소용돌이치는 공간이었다. 그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중국인들에게 섬세한 필치로 감수성을 자극하며 인간내면의 문제를 다룬 장아이링의 작품은 커다란 매력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장아이링 열풍'은 문학적 역량이 담보된 조건 하에서 중국사회가 확대된 문화적 포용력을 준비하고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지점에 위치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정치적인 기준으로 재단하는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개인의 사소하지만 절박한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국현대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동생 저우쭈어런(周作人), 최고 여류작가 장아이링의 남편 후란청, 중국의 최고지도자 장쩌민(江澤民)의 아버지 장스쥔(江世俊)은 모두 친일파였다. 그러나 친일파 가족을 이유로 루쉰, 장아이링, 장쩌민의 평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의 정치적인 안정성을 바탕으로 역사에 대한 정치적 단죄와 평가가 마무리되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평가절하된 인물을 재조명하는 과정으로 장아이링을 이해한다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친일파 청산의 요란한 뒷북은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로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차이나]는 그날 그날의 중국 근현대 소사(小史)를 전하며 중국 역사 속의 오늘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