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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가 지나고 이슬이 하얗게 된다는 백로(白露)가 며칠 남지 않았다. 여름 끝자락은 쉬 자리를 내줄성 싶지 않지만 아침저녁엔 어김없이 가을이다. 빨간 고추 널어둔 시골 풍경이 정겹다.
고향마을에선 김장거리를 손보느라 농부네 허리가 휘고 무릎 마디마디가 쑤신다. 어느새 무와 배추는 성큼성큼 자라서 새 잎사귀로 화답을 한다. 김장거리 풍성하도록 쏙쏙 솎아내서 어린 싹으로 물김치를 담가볼까. 이제 잡초도 제풀에 한풀 꺾인 듯 씨앗을 잔뜩 머금고 내년을 맞이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들깻잎은 엽록소를 한 스푼 덜어내고 노란 기운을 뽐내니 투명하게 햇볕이 반쯤은 통과하는 듯하다. 한 잎 두 잎 차곡차곡 포개서 된장에 박아둬야겠다. 구부러진 물파스 모양으로 볼품이 없어진 오이도 몇 개 옆옆이 넣어두리.
쌀쌀한 밤기운에 자줏빛 가지 다닥다닥 열리니 가지가 휠 지경인데 따는 족족 네 쪽으로 칼집을 내서 빨랫줄에 걸어둔 시골 아낙 마음은 벌써 겨울이다. 그땐 손바닥 둘을 합쳐도 모자란 넓은 토란잎과 아주까리 잎을 단단히 실로 묶어 처마 밑에 걸어두었지.
호박도 쇤듯하면 된장에 멸치 넣고 자글자글 끓이면 최고로 맛있는 찬이다. 몇 덩이는 얇게 썰어 양철이나 마당 바위에 살짝살짝 걸쳐놓으면 가을 햇살과 맑은 이슬을 머금고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지겠다.
고구마대 껍질을 벗겨 나물로 무쳐 질겅질겅 아삭아삭 씹히도록 하자. 까치밥보다 훨씬 많은 양을 그냥 삶아서 널어두면 두고두고 먹는다. 매운탕에 들어가고 겨울철 묵나물로 쫄깃한 섬유질을 제공한다.
여름걷이라는 말이 있을까? 초가을에 여름철 나물과 채소를 한 번 반짝 거두니 여름을 거둬들인 셈이다. 귀뚜라미 “솔 솔 솔” 노래하고 메뚜기 “찰~찰~찰~” 속삭일 때 빨간 고추잠자리도 맹추를 귀로 눈으로 즐겁게 한다.
다음 철과 내년을 준비했던 어머니 부지런한 마음을 반이라도 따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어머니는 논일 하시고 밭일 마치고 일곱 여덟 자식들 밥 해먹이고 옷 입히고 나서도 밤늦도록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모자란 채 먹을거리를 굳혀놓았다.
어젠 밭에서 잔뜩 가져다 준 채소 때문에 부부싸움까지 했다. 예전 그 마음을 기대한 내가 바보다. 애초에 기대하지 말 것을…. 내 몫만 해먹으면 그만인 것을 갖가지 일거리를 만드는 철없는 남편이라니! 바깥일과 집안일 차지가 뒤바뀐 경우에 두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내년을 위해 난 무얼 할까? 산에 들에 며칠을 싸돌아다니면서 산나물 씨나 옴팍 따서 와야 할까 보다. 소소한 다툼에 연연하면 세월은 가파르게 물 흐르듯 흘러가고 말지니. 마른 가을 햇살에 탁한 정신도 좀 말리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