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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탐험의 역사> 책표지
<달 탐험의 역사> 책표지 ⓒ 도서출판 성우
'스푸트니크 충격에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까지 달 탐험의 역사를 다룬 이 책 <달 탐험의 역사>가 순수하게 '우주를 향한 인류의 끊임없는 도전'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961년 소련이 가가린과 티토프를 지구 궤도로 먼저 쏘아 보낸 후 NASA가 미국의 실추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우주경쟁에서 1위 자리를 되찾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가가린이 최초로 우주비행을 한 후 겨우 18일이 지난 1961년 5월 케네디 대통령은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무사히 지구로 귀환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NASA는 발칵 뒤집혔다.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웠지만 문제는 다시 지구로 안전하게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이 쏘아올린 머큐리(3호) 우주선이 발사 40초만에 궤도비행을 실패하는 등 NASA의 우주비행 프로젝트가 한동안 실패를 거듭하다 1962년 2월 존 글렌이 미국 최초로 궤도비행에 성공했다.

가가린을 우주로 실어 보낸 보스토스 로켓이 공개된 것은 6년이 지난 후에서였다. 그 와중에 가가린은 1968년 3월 제트연습기 충돌사고로 사망, 영원히 34세의 신화적인 영웅으로 남았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20세기의 '파우스트'

인간이 달 착륙에 치른 대가는 어마어마하다.

나치시절 독일의 로켓 선구자 폰 브라운이 V2로켓을 생산하기 위해 1943~1945년까지 로켓생산 공장이었던 하르츠산 아래에 건설된 도라공장에서 벌어진 삶과 죽음은 극명한 한 예다.

당시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등지에서 끌려와 노예처럼 착취당하던 유럽의 포로 노동자 6만명 중 2만 명이 과로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노동자들은 V2 로켓의 정상적인 생산을 막기 위해 계획적인 파업을 벌이는 등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교수형 등의 끊임없는 죽음이었다.

12시간씩 교대로 일했던 노동자들이 줄을 지어, 때로는 벌거벗은 채, 지하공장으로 들어가고 또 나왔던 길을 걸으며 한발 한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어야 했다. 이후 NASA의 유인 우주비행 프로그램이 전적으로 독일 출신 망명 기술자(폰 브라우과 커드 데버스)들의 손에 의해 맡겨진 것은 아이러니하다.

한때 악마에서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로 불렸던 폰 브라운은 1982년 인간을 화성에 착륙시키겠다는 계획을 가진 야심찬 인물이었다. 결국 폰 브라운은 1957년 10월 4일 '첫 인공위성 발사'의 타이틀을 거머쥔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린 지 불과 넉 달만에 58년 1월 31일 익스플로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생, 미국에 가능성을 안겨줬다.

NASA가 소련의 우주기술을 앞지르는 순간은 1966년 3월 제미니 8호 비행 때였다. 소련도 성공하지 못한 우주상공에서의 도킹에 성공한 것이다.

아폴로 역사를 쓰다...패권의 우주탐험 역사

아폴로 프로젝트 중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인 아폴로 1호는 그리섬과 화이트, 샤폐 등 3명의 비행사였다. 하지만 그들은 발사 3주 전 지상 최종 훈련을 하던 중 화재로 사망, 냉전 경쟁의 희생양이 됐다.

화재사고를 계기로 소련 정치인들의 아폴로 계획에 대한 혹독한 비판은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 중에 사망한 블라디미르 코마로프의 사망으로 진정국면으로 접어들 정도로 미-소의 신경전은 대단했다. 결국 1967년 10월 새턴로켓을 타고 날아오르는 최초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 7호의 발사 성공은 달 착륙 프로그램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상당한 국가의 예산은 로켓을 쏘아올리는 데 쓰여졌다. 1968년 한 해동안 굵직한 우주선 발사만 해도 29건이 예정돼 있을 정도로 치열했다. 달을 향한 경쟁에서 기사거리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기자들도 예민해져 갔다.

이후 아폴로 13호의 실패를 제외한 아폴로 8~17호의 비행은 수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 희생을 요구하며 점차 달 정복의 꿈을 이뤄나갔다. 최초의 달 착륙을 한 아폴로 11호 비행사가 기록한 사진 분량은 1000장 정도. 하지만 달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월석(月石)이 폭발을 일으킨다?

물론 책 속엔 그러한 우울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마다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과 에피소드를 통해 달 탐사와 관련된 온갖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풀어놓는다.

지구로 가져온 월석(月石)이 지구 대기와 접촉하면 폭발을 일으킬 거라 예상했던 당시 과학자들의 생각주머니. 달에서 정체불명의 외계생명체가 묻어오지 않았을까 싶어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로 귀환하자마자 격리시설에 갇혀 3주 동안 지내야 했다는 일화. 방귀가 자꾸 나오게 만드는 우주비행사들의 포타슘 함유 식단까지 당시에는 진지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이없는 이야기들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올해 7월 20일은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날아가 첫 발걸음을 내딛은 지 36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때도 여전히 유인 우주비행을 위해 동물 실험 대상이 된 것은 침팬지와 원숭이였다. 러시아의 개 라이카는 1957년 11월 3일, 최초로 우주로 보내진 생명체였다. 미국의 침팬지 햄보다 3년 앞선 라이카는 햄과 달리 지구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발사 7일째 되는 날 산소 부족으로 숨을 거두었다.

지구와 달...그 불가분의 함수 관계

NASA의 달 탐사 프로그램은 냉전의 시대 미국의 국가적 위신을 제고하고 군사적 패권을 지키기 위한, 근·현대사를 통틀어 유례없는 기술적 도전이자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전 지구를 불안과 갈등 속에 몰아넣었던 2차 세계대전과 이후의 냉전 및 동서 대립이 결국 달탐험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역설도 듣기 좋게 들린다.

그러면 달과 지구의 관계는 대체 뭘까? 왜 그렇게 목숨을 걸며 달을 탐험하려고 했을까. 이 책은 달에 얽힌 미스터리까지 속 시원히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단 달 정복에 대한 조작설에 대한 우려만큼은 말끔히 씻어준다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약 38만4400km. 자전주기와 공전주기가 똑같아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한쪽 면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주기는 29.530589일로서 달력(月歷)의 기준이 된다. 이로 인해 지구상에서의 조수간만에 중력으로 영향을 미치며 여성의 생리 주기를 '달거리'라 부르는 것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가장 친숙한 천체, 정복까지 했다는 달에 대해 정작 우리는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태양(해)은 달에 비해 400배나 크지만, 이상하게 달에서 정확히 400배 멀리 떨어져 있다. 그 결과 지구에서 보는 크기(시지름은 약 0.5도)가 비슷해 서로 일치함으로써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개기 일식이 가능한 이유가 된다.

이집트 출신의 지질과학자 파루즈 엘 바즈 박사는 3가지 비유 이론을 내놨다.

첫째, 달은 지구가 다른 궤도에서 데려온 '아내'이다.
둘째,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딸'일 수도 있다.
셋째, 동일한 먼지구름으로 생겨난 '누이'일 수도 있다.

현재 아폴로호의 성과로 인한 과학적 성과 목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달과 지구는 태생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동일한 물질이 서로 다른 비율로 결합해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3개 가운데 '누이 이론'이 힘을 얻은 것이다. 아폴로 17호가 1972년 12월 마지막 비행을 한 이후 30년 이상 인류는 단 한 번도 달에 다녀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당시에나 지금에나 많은 인간이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세상에서 우주 탐사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은 과연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달에 6번 간 아폴로
<아폴로 달 정복 도전사>

아폴로호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가장 다재다능한 신 아폴로에서 따왔다. 아폴로는 달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와 쌍둥이 남매로 빛을 관장하는 신. 또 음악의 신으로 오르페우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델포이 신전에서는 예언의 신이며 그 밖에 시(詩)의 신, 의술의 신, 궁술의 신, 가축의 신으로 숭배된다.

세계 최초로 달을 찾은 우주선은 아폴로 11호를 비릇해서 12호, 14호, 15호, 16호, 17호 총 여섯 번에 이른다. 6회의 성공적인 비행을 통해 모두 385kg에 달한 월석이 수집됐다. 전 세계의 지질학자들은 아직도 달에서 가져온 돌과 흙을 분석 중이다.

▲ 아폴로 11호 - 1969. 7. 16 발사

1969년 7월 20일 지구상의 10억명의 시청자가 TV화면을 지켜보는 가운데 달착륙선 이글호가 달 표면에 착륙 성공. 착지 2시간 후 인류가 최초로 달 표면에 발을 내딛음. 우주 비행사는 달에서 22시간을 보냈으며 2시간 40분의 선외 활동 후 22㎏의 월석 수집. 우주 비행사들은 지구를 떠난 뒤 8일만에 귀환하여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으며 검역을 위해 3주간 격리됨.

▲ 아폴로 12호 - 1969. 11. 14 발사

인류의 두 번째 달 착륙으로 서베이어 3호 탐사선으로부터 180m 떨어진 곳에 착륙. 우주 비행사들은 31시간 30분 동안 달에 있었으며 두 차례에 걸친 7시간 45분의 선외 활동과 과학 실험 및 표본 채취. 11월 24일 지구로 귀환.

▲ 아폴로 13호 - 1970. 4. 11 발사

1970년 4월 13일 서비스 모듈에서 산소 탱크가 폭발하여 승무원 3명 전원이 위급 상황을 맞음. 달까지 반 이상을 비행한 승무원들은 사령 서비스 모듈이 동력과 산소, 물을 공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비행을 취소. 3명의 우주 비행사들은 생존을 위해 달착륙선에 남아 있는 산소를 사용하여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아 4월 17일 태평양에 착수.

▲ 아폴로 14호 - 1971. 1. 31 발사

아폴로 13호가 수행하기로 했던 실험을 9일간 대신 수행 하였고 45㎏의 월석과 흙을 수집.

▲ 아폴로 15호 - 1971. 7. 26 발사

달의 고지에 착륙하여 그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 활동과 79㎏의 암석 수집. 67시간 달에 머무르면서 18시간 30분에 걸친 세 번의 선외 활동, 최초로 월면차를 사용하여 27㎞ 이상의 거리를 이동.

▲ 아폴로 16호 - 1972. 4. 16 발사

착륙선 밖에서 20시간 동안 표본 채취기를 이용하여 표본 수집과 인공 지진을 이용한 지질조사. 97㎏의 월석 수집과 사령 서비스 모듈에서 달의 지도를 만들었고 4월 27일 태평양에 착수.

▲ 아폴로 17호 - 1972. 12. 7 발사

달에 착륙한 유일한 지질학자인 '해리슨 슈미트'는 월면차를 타고 35㎞가 넘는 거리를 이동 하면서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들이 채취한 110㎏의 표본에는 주황색 흙이 섞여 있었음. / 양김진웅

덧붙이는 글 | 지은이 : 레지널드 터닐

PA통신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1956년 BBC에 입사한 후 30여 년간 우주항공 전문 기자로 활약했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시작으로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 프로그램로 이어진 미국의 유인 달 탐사 프로그램, 그리고 그 후의 행성 간 우주비행까지 빠짐없이 보도하며 NASA의 역사와 인생을 함께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평생을 우주항공 분야의 보도에 헌신한 인물이다. 전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의 보도를 통해 우주로 나아간 인류의 위대한 도약을 지켜보았다. 1970년 4월 13일, 아폴로 13호의 폭발 사고를 처음으로 보도했으며, 비(非)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NASA 기자상을 받았다.


달 탐험의 역사 - 스푸트니크 충격부터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까지

레지널드 터닐 지음, 이상원 옮김, 도서출판성우(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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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대자(大者)는 그의 어린마음을 잃지않는 者이다' 프리랜서를 꿈꾸며 12년 동안 걸었던 언론노동자의 길. 앞으로도 변치않을 꿈, 자유로운 영혼...불혹 즈음 제2인생을 위한 방점을 찍고 제주땅에서 느릿~느릿~~. 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 아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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