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푸른 물빛이 고운 쇠소깍 전경
푸른 물빛이 고운 쇠소깍 전경 ⓒ 김동식
가을의 시작, 그 기다림의 의미

제주 가을의 첫자락에서 느끼는 분위기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쇠소깍이다. 서귀포시 효돈동 하효마을에 있는 쇠소깍은 효돈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있다. 도심지에서 10분 거리에 있지만 제주 섬주민들도 잘 모르는 숨겨진 명소이다. 오랜 세월을 베일에 가리고 속세와 거리를 두어 왔다. 낯선 곳이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에 흥미를 붙인 여행자라면 길이 서툴러도 발걸음은 한결 가벼울 듯싶다.

쇠소깍이 시작되는 곳이 멀리 보인다.
쇠소깍이 시작되는 곳이 멀리 보인다. ⓒ 김동식
쇠소깍은 마을의 이름과 연관이 깊다. 서귀포시청에서 발간한 지명유래집(1999년)에 따르면 하효를 부르던 옛 이름은 쇠둔이며, 효돈천의 하구에 소(沼)가 있다고 하여 이를 '쇠소'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 맨 마지막을 나타내는 제주말인 '깍'이 합쳐져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이름인 '쇠소깍'이 태어나게 되었다.

쇠소깍은 제주에서도 가장 독특한 곳이다. 주변의 암벽지대는 갖가지 상록수와 소나무, 접암나무 등 다양한 식생들이 살아가는 울창한 생태숲이다. 숲속에는 물가로 내려갈 수 있도록 오솔길이 나 있다.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지난 여름 이 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은 이미 서서히 흙속에 스며드는 중이었다. 나무숲 사이로 옥빛 호수가 수줍게 고개를 여미는 게 보인다.

흐드러게 생명을 발산하는 고사리군락
흐드러게 생명을 발산하는 고사리군락 ⓒ 김동식
용왕의 전설이 묻어있네

이 곳에서 돌을 던지거나 떠들면 용왕이 화를 내 폭풍우를 일으키고 그해 농사가 흉작이 된다는 전설이 흥미롭다. 가뭄이 들었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곧바로 큰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그만큼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화산활동의 흔적이 보이는 기암
화산활동의 흔적이 보이는 기암 ⓒ 김동식
쇠소깍은 용암이 흘러내려 굳은 암반 사이로 물길이 나 있고 산정호수처럼 생겼다. 폭은 10~30m 정도, 길이는 120m, 물 속 깊이는 4~5m로 규모가 크지는 않다. 양(量)으로 승부하는 세계에서는 기대에 못미쳐 서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숨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정화시키는 능력만큼은 군계일학이다.

물과 나무와 기암은 하나
물과 나무와 기암은 하나 ⓒ 김동식
눈이 시리도록 푸른 빛깔을 토해내는 산정호수는 자연 밖의 번뇌와 질투, 망상, 욕심을 모두 빨아들일 것만 같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기암절벽이 버티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물 속으로 빨려들어가 그 일부가 되어 버렸다.

이 병풍바위들은 화산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용암들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지질자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산활동의 흔적이 구석구석 묻어 있다. 지질학계에서도 제주에서 가장 오래전에 분출한 조면암이 분포하는 곳으로 쇠소깍을 주목하고 있다.

테우타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자연입니다.
테우타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자연입니다. ⓒ 김동식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며 다가오라고 손짓하는 쇠소깍은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는 성급한 여행자들에게는 기다림의 미학을 학습해 보라고 가르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가슴 속에 묻어두고 싶은 미지의 세계, 그래서 쇠소깍은 류시화의 시를 많이 닮았다.

물 속에는/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하늘에는/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그리고 내 안에는/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그대가 곁에 있어도/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詩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전문


가슴을 활짝 펴니 쇠소깍의 끝, 바다가 보이네
가슴을 활짝 펴니 쇠소깍의 끝, 바다가 보이네 ⓒ 김동식
바다와 맞닿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예전의 돛단배 항구인 소금막이 반겨준다. 이 곳의 짠물을 퍼다가 소금을 만들었다고 해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하효마을의 상징인 검은 모래가 제자리 찾기에 분주하다. 해풍을 동반하여 바다 멀리 지귀도를 돌아온 파도가 제법 시끄럽다.

생명의 숲과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곳에서 회유하는 바다 생물들, 그리고 검은 모래와 바다가 하모니를 이루는 쇠소깍은 대자연의 압축판이다. 수려한 경관과 다양한 생물자원이 공존하는 이곳은 2003년 1월 유네스코에 의해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서귀포시에서 국도 12호선(일주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가다가 하효신호등 사거리에서 보목리 방면으로 들어간 다음, 바다로 계속 향하다가 해안으로 난 길을 타고 동쪽(효돈천 방면)으로 접어들면 숨겨진 명소 쇠소깍이 그 끝자락을 드러낸다. 

주변 가볼만한 곳 : 정방폭포, 거믄여해안경승지, 제지기오름, 월라봉공원, 서귀포감귤박물관, 큰엉해안경승지, 신영영화박물관

'내 고향 명소'에도 응모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