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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고궁박물관
내가 처음 달항아리를 만난 것은 1999년 6월, 김환기 25주년 기획전 '백자송'에서였다. 김환기가 그린 은은한 달항아리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달 항아리의 아름다움에는 완전한 까막눈이었다. 김환기가 '미에 대한 개안(開眼)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던 것에 빗대어 말해 본다면, 나의 달항아리에 대한 개안은 김환기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기획전에서 만난 달항아리는 푸근한 정감, 더없이 투박하면서도 유려한 곡선, 달푸른 청색과 은은한 흰 빛이 놀랍도록 어울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항아리가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산 날들이 억울할 만큼 김환기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고요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엔 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 싸늘한 사기지만 그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과장이 아니라 나로선 미에 대한 개안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둥근 항아리, 품에 넘치는 희고 둥근 항아리는 아직도 아직도 조형의 전위에 서 있지 않을까."

ⓒ 김환기
1963년 4월, '항아리'란 제목으로 발표한 김환기의 글이다. 매화와 항아리를 함께 놓고 그린다거나 달빛과 항아리를 함께 그린다거나 한 김환기의 그림들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도 모두 김환기의 그림 속 항아리들이 '다사로운 온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김환기를 통해 달항아리를 만난 뒤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갈 때마다, 백자 항아리만큼은 꼭 보고 나오곤 했는데 달항아리는 그 수가 많지 않아서 늘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전의 중앙박물관 자리에 새로 '국립고궁박물관'을 개관하면서 특별전으로 '백자 달항아리' 전시회가 열렸다.

이번에 전시하는 백자 달항아리는 모두 9점이다. 개인 소장이라 일반에 공개되지 못했던 작품들과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과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까지 함께 모아 놓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특별전'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전시회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조명을 받은 항아리들이 부드럽고 은은하게 사람들을 맞아 주고 있다. 커다란 달이 아홉 개나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명을 밝히지 않았더라도 항아리들이 알아서 전시장을 밝혀 주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환하고 또 환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은 아무래도 수백 조각으로 깨졌다가 도로 원형을 복구했다는 일본 미술관 소장 달항아리였는데, 물론 그것도 아름답고 예뻤지만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8세기 항아리다. 대개의 달항아리들이 그 크기가 엄청나서 한 번에 굽지 못하고 위쪽과 아래쪽을 따로 빚어 붙여 만든 것이다 보니 이음 자국이 어떻게든 크게 남을 수밖에 없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의 항아리는 그 이음새가 기우뚱하여 개구지게 웃고 있는 꼬마처럼 정겹게 보이기 때문이다.

표정을 가지고 있는 항아리를 만난다는 것은, 위압적이거나 고아한 항아리를 만나는 것보다는 훨씬 즐거운 일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이 항아리는 오똑하니 앉아서 오가는 이들을 어여뻐해 주고 있었다.

기름을 담았던 항아리(삼성미술관 소장)는 또 어떤가. 기름 얼룩을 그대로 내비치며 애초에 이 달항아리들이 우리 백성들의 삶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잠깐, 항아리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이 커다란 항아리들은 완벽한 조형미를 갖추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조금 삐뚤고 이지러진 것이 더 큰 매력이다.

"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 낸 백자 항아리의 흰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을 우리는 어느 나라 항아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대견함을 느낀다. 이러한 백자 항아리들을 수십 개 늘어놓고 바라보면 마치 어느 시골 장터에 모인 어진 아낙네들의 흰옷 입은 군상들이 생각나리만큼 백자 항아리의 흰색은 우리 민족의 성정과 그들이 즐기는 색채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순우 선생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에 쓰신 그대로다. 항아리를 두고 어느 시골 장터에 모인 어진 아낙네들을 떠올리는 선생의 순한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는 좋은 글이기 때문에 달항아리의 아름다움과 정겨움이 더 가까이 여겨진다.

전시장을 찾은 교복 입은 아이들은 "이게 뭐야? 이게 다야?" 볼멘소리를 늘어놓고 있었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후덕한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와 박히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이 나라에 보름달이 뜨고, 그 보름달을 닮은 고운 사람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어쨌든 나는 무지하게 행복했다, 이 순박한 항아리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서.

▲ 18세기에 만들어진 이 백자 달항아리는 지금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수백 조각으로 깨어져 나갔던 것을 4년 넘는 시간이 걸려 지금의 상태로 복원해 놓았다.
ⓒ 국립고궁박물관

덧붙이는 글 | *지난 8월 15일에 개관한 국립고궁박물관(www.gogung.go.kr)은 9월 30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추석 연휴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고 하니, 모쪼록 한가위 달님을 닮은 넉넉한 '달항아리' 전시회를 꼭 보고 오시기를. '달항아리' 전시회는 9월 25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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