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미 예고된 결렬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연정 제안의 진정성을 설명하며 거국내각 구성까지 제안했지만 박근혜 대표는 거부의사를 밝히며 연정논의 중단을 촉구했다.

대연정의 상대가 바로 면전에서 거부의사를 분명히 한 이상, 연정론 자체는 더 이상 힘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노 대통령이 이끌어온 연정정국은 이제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 것이냐에 있다. 현실적으로 대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연정정국이 마감될 것인가, 아니면 연정론보다 더 강도높은 노 대통령의 새로운 제안이 이어지면서 연정정국의 제2라운드가 시작될 것인가.

지역구도와 연정문제에 대한 노 대통령의 '집착'을 보면 유감스럽게도 후자의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여기서 '유감스럽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노 대통령의 연정론이 남긴 폐해가 너무도 크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선 노 대통령을 향한 민심의 이반이 확산되었다. 많은 국민들에게는 지역구도 해소를 위한 대통령의 진심보다 대통령의 고집스러움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이같은 상황은 노 대통령에게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다. 오죽하면 유시민 의원 입에서 "대통령 조롱하기가 정신적인 국민스포츠가 됐다"는 탄식이 나왔을까. 다름아닌 연정논란 때문이었다.

'진정성'과 '선의'가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

노 대통령의 연정론은 그동안 우호적이었던 개혁·진보층에서의 '등돌리기' 현상을 낳았다. 이들은 다른 근본문제들을 젖혀놓고 선거구제 개편에 대통령직을 걸겠다는 노 대통령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했다. 더욱이 민심을 '거역'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노 대통령의 독단적 모습은, 그간의 '우호적 정서'를 '회의적 정서'로 바꾸어놓는 결과를 낳았다.

그 뿐이 아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연정논란을 거치면서 거의 완벽하게 망가져버렸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시종 노 대통령의 발언을 쫒아가기에 정신이 없었고, 결국에는 일관성조차 상실한 모습을 보였다.

'노-박 회담'을 통한 대연정 담판 광경은 연정정국에서 여당이 설 자리가 아무데도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연정정국에서 열린우리당의 운명은 사실상 노 대통령에게 백지위임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집권여당의 초라함이 국민들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연정논란은 이렇듯 모두에게 상처를 안겨주었다. 연정논란이 계속될수록 최대의 피해자는 노 대통령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이 아무리 뛰어난 승부사이고, 비장의 후속카드가 있다 하더라도 등돌린 마음들을 되돌리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제2의 연정정국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커보인다. "연정은 더이상 말 꺼내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는 박 대표의 말에 대해 노 대통령은 "또 다른 대화정치의 방안이 있는지 연구해 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여기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그래서 모두가 노 대통령의 후속카드에 관심을 쏟다보니 온갖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여당 탈당설, 내각제 개헌 제안설, 국민투표설, 선거구제 개편 시한 통첩-대통령직 사임 연계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안개정국이 계속되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정쟁으로 안개정국을 조성하면 국가의 안정을 위해 그 안개를 걷어달라고 주문해야 할 사람이 바로 대통령이다. 그런데 이유야 어찌되었든 대통령이 안개정국의 원인제공자로 자리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개인의 주관적 판단으로 정국을 혼돈 속으로 몰아가는 일, 그것은 대통령이 해서는 안될 일이다. '진정성'과 '선의'가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

연정은 여기서 마감하고 사회 양극화 해소에 나서라

이미 늦었지만, 연정정국은 여기서 마감하는게 옳다. 국가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그리고 노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도 연정주장은 이쯤에서 접어두는 것이 마땅하다.

그대신 노 대통령은 남은 임기동안 우리 사회의 진짜 근본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미 최장집 교수가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들은 '회피'하고, 심각성이 상대적으로 덜한 지역구도 문제에 모든 것을 거는 모습은 납득하기 어렵다.

정작 대통령직을 걸고 나서야할 문제들은 다른 곳에 있다. 여러 학자와 정치인들도 말했지만, 우리 사회에는 양극화라는 거대한 문제가 있다. 이대로가면 태어날 때 개인의 평생운명이 이미 결정지어지는 두려운 사회가 도래하게 되어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 80퍼센트 이상의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이고, 대다수 삶의 희망과 절망을 가르는 절박한 문제이다. 선거구제 개편문제에 비할 바가 아니다. 대통령직을 걸더라도 그런 일을 위해 걸어야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고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존심으로 무리하게 버틸 일도 아니다. 대통령의 자존심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조롱하는 일이 국민스포츠가 되어버린 현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을지 헤아려야 한다. '그것 보라'는 집안 어른들의 핀잔에 아무 소리 못하게 된 젊은이들의 마음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라도 노 대통령이 제 길을 찾는다면, 그것은 '노-박 회담'이 낳은 유일한 성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