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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디바리우스> 표지
<스트라디바리우스> 표지 ⓒ 생각의 나무
현존하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보면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박물관에나 보관되어 있을 예술품들은 때로 돈많은 부자의 거실에, 운 좋은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기도 한다. 그것들은 명품이라 불리며 그 가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는 바로 돈과 연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일까.

예술품이 아직도 '살아서' 이용되고 그 가치를 더할 때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더하게 한다. 건축물이 그러하고 순회 전시되는 그림, 조각이 그러하고, 고전적인 기계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시각으로 느끼는 충만함. 그 외에 청각적인 요소가 더 한다면?

"바이올린은 르네상스 후기의 위대한 산물 중 하나로, 순간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발전 과정을 거쳐 정착된 악기다."

우리가 흔히 보는 부락공동체의 원시적인 악기 형태가 고유한 음색을 가진 조화로운 형태로 탄생한 것은 르네상스 후기의 일이다. 이때 바이올린, 첼로의 초기 형태가 등장하게 됐다. 소리 이전에 유연한 곡선과 f자 모양의 울림구멍 한쌍은 과거 광고에서도 차용되었지만,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스트라디 바리우스. 현존하는 5대의 바이올린과 1대의 첼로가 그를 증명하고 있다. 그를 잘 알지 못해도 바이올린 브랜드의 최고봉에 있다는 것은 어디선가 주워 들은 적이 있다. 17세기 중반부터 발표한 그의 악기들은 추론이 불분명할 정도로(?) 훌륭해서 그의 스승이 누구였는지 어떠한 역경을 딛고 명품에 이르는 손기술을 터득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후기 바이올린의 라벨로 추정하는 스트라디바리의 출생 연도는 1944년. '1644년 니콜로 아마티의 제자인 크레모나의 안토니우스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라벨이 그의 초기 바이올린이고 스승이 누구인지 추정하게 해 준다. 하지만 1667년에는 완전히 독립한 스트라디의 라벨이 보이고 아마티 공방의 작품들에서 스트라디바리의 것을 볼 수 없다는 점, 또 연간 인구 조사 기록에도 그가 스승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는 독립적인 천재였다. 순종적인 견습생이 아니라 사업가 기질을 가진 스승을 금방 뛰어넘은 제작가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전통을 이해하고 존중했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은 천재의 행보는 오히려 그의 성공을 더디지만 더 확고하게 했다.

18세기 초반이 그의 황금기였다. 그는 60대였지만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있고 그의 아들들이 그의 손길을 따르고 있었다. 이미 유럽 최고의 현악기 제작자로 군림했다. 1737년 12월 19일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바이올린 석 대가 말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만든 악기는 위대한 연주가들에 의해 사랑 받았고 그 가치가 더욱 빛났다. 때로는 연주가가 아닌 사업가에 의해 그 가치가 더욱 오르는 경우도 있었고, 둘 다인 파가니니에 이르러 두드러진 기법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바이올린. 스트라드. 탄생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작자가 죽고 난 뒤 몇 세기를 거치면서 겪는 역경과 그에 얽힌 수많은 일화들. 주인공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니라 그의 악기들이다. 그 흥미로움이 300여 페이지에 걸쳐 펼쳐진다.

오늘 바이올린의 향기에 빠져 본다.

덧붙이는 글 | 스트라디바리우스/ 토비페이버 /생각의 나무 /1만5000원


스트라디바리우스

토비 페이버 지음, 강대은 옮김, 생각의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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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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