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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신궁의 도리이
메이지신궁의 도리이 ⓒ 박경
방금 전에 다녀온 메이지신궁이 차라리 편안한 나이가 되어 버렸다. 도쿄 최대의 신사로 꼽히는 메이지신궁은 메이지 일왕과 그의 부인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무엇이든 작게 만드는 일본인들이지만 신궁의 도리이(鳥居 とりい)만큼은 하늘에 가 닿을 듯 위압적이다. '하늘 천(天)'자 모양을 한 도리이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새들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한다.

발 밑은 뽀작뽀작 자갈 소리, 머리 위는 사릉사릉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거기에 취해, 앞서가는 남편과 딸을 일부러 따라잡지 않고, 홀로 신궁 앞에 가 닿았다. 본전 앞에는 에마가 겹겹으로 걸려 있었다. 에마는 소원을 적어 걸어놓는 나무판인데, 일어나 영어는 물론 종종 한글도 눈에 띄었다.

메이지신궁의 한글 에마들. '독도는 KOREA 땅'이라고 쓰여져 있다.
메이지신궁의 한글 에마들. '독도는 KOREA 땅'이라고 쓰여져 있다. ⓒ 박경
신궁 앞 우물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먹지도 닦지도 않았다. 먹지 않은 건 먹는 물이 아니란 걸 알았으니 당연한 거고, 닦지 않은 건 조선침략의 원흉인 메이지 일왕을 위해 굳이 내가 정갈히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연히 그런 일왕에게 소원을 빌 이유도 없었기에 에마도 걸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본전 앞에서도 마치 우리가 분수에 동전을 던지듯이 나무통에 동전을 던지고는 두 번 절을 하고 두 번 손뼉을 짝짝 때렸다. 나도 뭐 그 정도 아량은 있어 1엔 짜리를 꺼냈다. 남편이 눈살을 찌푸렸다. 쓰는 김에 좀 더 써라, 하는 눈치다. 거기에 굴할 내가 아니다. 와준 것만도 어딘데 돈까지 들이랴. 주변의 일본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당당하게 1엔짜리를 던졌다. 에라 이 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폼으로. 톡, 하고 나뭇살을 맞고 떨어지는 소리가 아닌 게 아니라 좀 가볍긴 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틈에서의 자유와 해방감

방금 다녀온 신궁 숲을 더듬다가 정신을 화르르 차렸다. 잘못하다간 앞선 사람들 뒷발에 채이기 십상인 타케시타도리에서 사람들 물결에 휩쓸려 저절로 흘러가고 있었다.

드디어 책에서 봤던 크레페 가게를 발견! 따지고 보면 참 별것도 아니건만 그래도 책마다 소개된 크레페를 먹겠다고 기를 쓰고 줄들을 섰다. 내 앞에 서 있는 여자는 같은 동양 아가씨였는데, 뚱실뚱실한 살에도 아랑곳않고 푹 파인 옷을 입어 풍만한 가슴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우리 가족과 나란히 가게 앞에 놓인, 우리식 복덕방 장기의자에 앉아서 크레페를 먹었다. 아가씨 옆에 있던 우리 딸이 귓속말을 했다. "엄마, 한국사람인가 봐." 내가 고개를 빼고 보니, 그 아가씨, 우리가 들고 있는 여행책을 들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그 다음이었다.

한국사람이란 걸 우리가 알아보았다는 걸 아가씨가 눈치챈 순간, 아가씨, 팔에 걸치고 있던 숄을 어깨에 둘렀다. 더운 여름날, 그 숄을 둘러 드러났던 가슴을 가리고 일어나 총총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국 땅에서 설 길 없는 뚱뚱한 여자, 한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옷, 입으면 욕만 처먹기 일쑤인 옷, 몇 세기 후면 멸종해 버릴 마른 인간들만 당당하게 입는 옷, 오늘 한번 입어보자, 입고 활개쳐 보자, 아무도 알아보는 곳 없는 낯선 땅에서. 어쩌면 그 아가씨는 이런 심정이었을까.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이 들자 괜스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눈치없이 왜 아는 척은 해가지고.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자유와 해방감일 것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틈에서 더 이상 '나'일 필요가 없다. 덕지덕지 낀 때처럼 지금까지 나를 이루어온, 그렇게 남들에게 보여져 온 모습들을 벗어놓고, 나의 다른 모습, 나조차 생각지 못했던 내 안의 불씨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참맛이다. 그런 자유와 해방감을 빼앗아 버렸으니. 아가씨, 제발 용서하시라.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여행은 꽝이다. 가족들과 함께 떠나는 아줌마들은 영 꽝이란 말이다. 사실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난 지쳤다. 여행책을 대여섯 권은 살피고, 인터넷을 뒤져 먹을 곳 가야 할 곳 자야 할 곳을 체크하고, 그것도 좀더 싸게 좀더 실속 있게 하려다 보면 이리 저리 머리 굴리고 여기 저기 알아보고. 이쯤에서 난 결심했었다. 다음엔 꼭 패키지로 가겠다고. 아무런 계획도 고민도 없이 훌쩍 패키지로 떠나 품위있게 구경하다 가뿐하게 돌아오겠다고.

여행지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 아줌마의 서글픈 본분

떠나기 전날, 집안 정리하고, 냉장고 비우고, 여행 가방 싸고. 떠나는 날 아침, 가족들 밥 먹이고, 설거지 하고, 여행가방 현관 앞에다 내 놓으면, 그제야 남편과 딸은 신발을 신는다.

뿐이랴. 여행을 떠나와서 역시 아줌마의 본분을 잊을 수가 없다. 호텔에 도착하자 마자 짐정리부터 하고, 여행 첫날밤부터, 열심히 빨래를 빨아대야 한다. 짐을 줄인답시고, 속옷 양말 등을 넉넉하게 가져온 게 아니라 한번 빨아서 말려 입는 걸 계산에 넣은 까닭이다.

남편과 딸은 호텔 들어오는 즉시 땀젖은 옷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엎어져 버린다. 이 아줌마는 쉴새없이 빨래거리를 주워 들고 욕실로 향한다. 또 일본의 욕조란 것이 쭈그리고 앉아 빨래를 할라치면, 엉덩이가 욕조에 꽉 낄 정도로 작은 것이다(내 엉덩이가 그리 큰 것도 아닌데!). 열이 살짝 받는다.

그러면 침대에 디비져 뒹굴던 남편은 무얼 하느냐? 다 빤 빨래를 들고 나온 나를 향해 우아하게 한마디 날린다. 피곤한데 안마 좀 해줄래? 아까 살짝 받은 열에 불이 확 붙는 순간이다. 내 눈알이 눈꼬리 끝에 가서 걸리다 뒷통수를 한바퀴 돌아 제자리에 오는 동안,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남편은 깨갱하고 꼬리를 내렸다.

나는 양말이며 속옷을 옷걸이에 요령좋게 널어 걸어두었다. 그러면 이제 끝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제부터, 저게 빨리 잘 말라주어야 되는데, 자기 전에 걱정 한 번, 자고 일어나서 만져보고 걱정 한번, 안 마르면 어떻게 해야 하나, 손가락 꼽아가며 길지도 않은 여행날수와 옷가지 수를 맞춰 본다. 그러다 정말 마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생선을 굽듯 양말 말리기
생선을 굽듯 양말 말리기 ⓒ 박경
생선을 굽는 것이다. 화장대 의자 위에 먼저 깨끗한 수건을 깐다. 그 위에 양말짝들을(도톰한 양말들이 특히 안 마르기 마련) 가지런히 눕힌다. 숙소에 구비된 드라이어로 바람을 쐬주는 것이다. 목이 짧은 여름 양말에 드라이 바람을 쐬면 납작하던 양말이 꾸덕꾸덕 말라가면서 바람이 양말 목 안으로 들어가 생선살처럼 후르르 부풀어 오른다. 그러면 한번씩 뒤집어 준다. 바닥 한번 등 한번, 그렇게 정성스레 생선을 굽듯 뒤집어가며 드라이 바람을 쐬어 주면 어느새 뽀송뽀송 마르게 된다.

이쯤에서 아예 쐐기를 박게 된다. 난 다음번엔 정말로 정말로 패키지로 여행 갈 거야! 커다란 슈트 케이스에다 날짜마다 갈아입을 옷 실컷 우겨 넣고 말이다. 그리고 혼자 갈 거야! 이제 가족여행은 싫어! 더 이상 가족들 챙기고 치다꺼리하면서 내 자신을 놓치는 여행은 하기 싫어.

홀연히 바람처럼 가뿐하게 나서서 오로지 내 한몸만 돌보고 나 자신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여행을 떠나야겠다…. 그리고 괜찮다면 한국에서는 결코 입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 옷도 입어야겠다. 가슴이 시원스레 패이고, 살 두둑한 어깨가 당당하게 드러나는 옷. 아니라면, 애 낳느라 두 겹 되고, 남은 밥 주워 먹느라 세 겹된 뱃살 다 드러나는 쫄티를 입으리라. 주책맞다고 퉁박 줄 사람도 없고, 아줌마 주제를 환기시켜 줄 그 누구도 없는 그런 낯선 곳으로 떠나야겠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하는 이 순간 왜 슬그머니 눈물이 나려는 걸까. 뭐야, 상상만으로도 벌써 감격한 거야 그런 거야…? 아, 대한민국 아줌마의 서글픈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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