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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사이로 두 갈래로 달려온 한탄강이 대회산리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지는 풍경이 보인다.
나무 사이로 두 갈래로 달려온 한탄강이 대회산리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지는 풍경이 보인다. ⓒ 이승열
남편은 '이과', 그것도 공대를 나온 전형적인 토목쟁이이다. 남편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목표는 리모콘을 들고 온갖 채널을 돌리며 소파 위에서 뒹굴뒹굴 휴일을 보내는 것이다. 틈만 나면 길을 떠나는 역마살 낀 마누라를 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고난이며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함께 여행을 가면 남편은 차 속에서 의자를 뒤로 젖혀놓고 쉬는 동안 나와 아들은 폐사지를 걷고 파란 하늘에 까치밥으로 남겨진 주홍빛 감을 바라보며 풍경 속에서 한참을 보낸다.

그러나 어쩌랴. 긴 세월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 삶이 이어지는 한 계속 함께 살건데 서로 맞추는 수밖에. 멋진 풍경 사진이 쌔고 쌨는데 비싼 돈 들여가며 사서 고생하는 마누라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단다. 그런 남편의 직업은 도로 설계사이다. 20년이 넘게 도로 설계를 하고 있으니 삼천리 방방곡곡 길이 없는 곳, 그것도 새로운 길을 내러 오지만 헤매고 다닌다. 물론 밥벌이를 하러 말이다.

정말 멋있다고, 다시 가고 싶다고 남편이 극찬한 풍경이 경북 봉화 청량산과 한탄강 주변이다. 오랫만에 남편이 먼저 서두르고 나섰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여러 일로 좀 쉬고 싶었는데, 자꾸 거부하면 앞으로 국물도 없을 것 같아 따라 나선 곳이 한탄강 대회산 마을이다.

남편은 그곳이 '그랜드캐니언'을 연상시킬 만큼 웅장한 풍경이라 했다. 철원평야 푸른 논밭이 끝나는 지점에 수직으로 40m 정도 되는 낭떠러지기가 있고, 그 사이를 폭 50m가 넘는 한탄강이 흐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 강 끝 낭떠러지 절벽 위에 시치미를 떼고 다시 논밭이 펼쳐지는 신기한 곳이라고 했다. 凹 무늬가 지상에 넓게 펼쳐진 것을 상상하면 되는데, 바로 무늬의 꺼진 부분으로 한탄강이 흐르고 있다고 했다.

凹 무늬의 양쪽 위가 강을 사이에 두고 포천군 영북면 대회산 마을과 중리 마을이고, 두 마을을 잇는 도로를 90년대 후반 설계했다고 했다. 지도에 두 마을이 선명이 연결된 것으로 보아 지금쯤은 공사가 끝났을 거라 예상하고 길을 떠났다. 수직의 절벽 위에 펼쳐진 평야, 그 아래 휘돌아치는 강물. 대체 어떤 풍광을 간직하고 있기에 남편이 그랜드캐니언에 비유할까?

대회산리로 들어가는 길 입구의 철망 너머 미군부대 초소, 젊은 군인들이 일일이 지나가는 사람을 검문하고 있었다.
대회산리로 들어가는 길 입구의 철망 너머 미군부대 초소, 젊은 군인들이 일일이 지나가는 사람을 검문하고 있었다. ⓒ 이승열

패이고 물이 고이고, 이십분 내내 가슴을 졸이며 달렸다.
패이고 물이 고이고, 이십분 내내 가슴을 졸이며 달렸다. ⓒ 이승열
군인들이 대회산리 입구를 막고 출입하는 사람들의 신상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었다. 미군부대에 혹 접근할지도 모르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다. 한낮에도 무섬증이 들만한 오지 한적한 산길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등줄기가 땀에 절어 있었다. 하루 종일 지나다니는 차가 몇 대 되지 않는 한적한 비포장도로를 말이다.

도로는 아직 포장 되지 않은 상태로 군데군데 심하게 패여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요철이 심한 자갈길이 차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 괜히 한국판 '그랜드캐니언'을 따라 나섰나보다.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대회산리. 불무산과 은장산 등 높은 산으로 첩첩산중 빙 둘러싸여 있다 하여 동네 이름이 대회산, 소회산인 산악지대이다. 수목이 울창하고 덩굴식물들이 엉켜 있어 덩치 큰 동물들이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다 하여 '곰덩굴'이라고도 불릴 만큼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곳이다. 북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튼 한탄강이 산기슭을 휘감아 돌며 멀리 임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곳 한탄강이 흐르는 포천, 철원 지역은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분출한 현무암이 하곡을 메워 용암 대지를 형성한 우리 나라 대표적인 화산지형이라 한다. 지표수의 부족으로 주로 밭농사를 짓는 제주도, 울릉도에 반해 철원 지역은 한탄강의 범람으로 용암대지 위에 오랜 세월 충적도가 쌓여 비옥한 토지를 형성해 논농사를 주로 짓는다고 한다.

구멍이 숭숭 뚤린 현무암. 여행을 다녀온 뒤 제주도에 버금가는 용암지대라는 것을 알았다.
구멍이 숭숭 뚤린 현무암. 여행을 다녀온 뒤 제주도에 버금가는 용암지대라는 것을 알았다. ⓒ 이승열

검은 용암에 구멍이 숭숭, 거기에 잔 돌까지 알맞게 비벼져 있다.
검은 용암에 구멍이 숭숭, 거기에 잔 돌까지 알맞게 비벼져 있다. ⓒ 이승열
여기 저기 검은 돌들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구멍 뚫린 현무암이 길거리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이 장관이었다. 길이 끝나는 마을 끝에 '종점상회'가 있었다. 설계는 했지만 환경 문제 때문에 도로가 뚫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남편의 예상이 적중했다. 길은 대회산 마을에서 끝이 나 있었다.

입구를 간신히 찾았다. 아무리 상상해도 그 작은 동네에 폭 50m가 넘는 한탄강이 굽이쳐 오르고 있는 광경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구멍 뚫린 검은 돌들이 자갈과 함께 섞여 여기 저기 뒹굴고 있는 점을 빼곤 벼 알곡이 익고 있는 평범한 시골 들녘이었다. 벼 이삭이 벌써 황금빛을 머문 채 고개 숙여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논밭이 끝나는 지점 나무, 그리고 절벽  아래 한탄강이 흐르고 있다.
논밭이 끝나는 지점 나무, 그리고 절벽 아래 한탄강이 흐르고 있다. ⓒ 이승열

아슬아슬. 더 이상 접근 불능. 언젠가 저 강물 위에 서리라.
아슬아슬. 더 이상 접근 불능. 언젠가 저 강물 위에 서리라. ⓒ 이승열
농로로 이용되는 좁은 길을 돌니 너른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오랜 세월 유유히 흐르며 장마 때마다 한탄강이 범람하면서 만들어 놓은 자연의 선물이다. 도저히 저 논밭의 끝에 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강물이 평지보다 훨씬 낮게 흐르고 있어 평지에서는 하천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지구대인 탓으로 강 양쪽이 깎아내린 듯한 절벽을 이루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왜 남편이 그토록 감탄하며 그랜드캐니언이라 칭했나 이해가 됐다.

논밭 끝에 이르니 불현듯 강이 나타났다. 저 절벽 아래 한탄강이 흐르고 있었다. 우거진 녹음이 한탄강 풍경을 숨기고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감질나게 조금만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씩 강 쪽으로 다가가 보지만 가파른 낭떠러지기 때문에 더 이상 나갈 수가 없다.

저 까마득한 절벽을 어떻게 내려갔을까? 나도 저곳에 시름을 풀어놓고 싶다.
저 까마득한 절벽을 어떻게 내려갔을까? 나도 저곳에 시름을 풀어놓고 싶다. ⓒ 이승열
강은 두 갈래로 흘러 이곳 대회산 마을에서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황토빛 강물이 휘돌아치고 있었다. 어떻게 내려갔는지 그 황토빛 강물에서 강태공이 세월을 낚고 있었다. 한 폭의 수채화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생각났다. 반짝이는 강물, 낚시대의 흔들림, 이내 하나가 되어 사람과 강물과 산이 구별되지 않았던 영화 속의 장면…. 그 장면이 절벽 아래 한탄강에 펼쳐져 있었다.

더 이상 강으로 접근할 길이 없음이 안타깝다. 나 혼자 왔으면 틀림없이 나뭇가지에 의지에 강물까지 내려가 보았을 터인데…. 아무래도 햇살 좋은 가을에 다시 와야겠다. 녹음이 짙은 색색의 잎들이 바닥에 떨어져 고스란히 강가 풍경을 드러낼 때 저 강 아래까지 내려가 봐야겠다. 아니 아예 강 상류인 고석정에 가서 래프팅으로 이곳까지 와서 강물 위에서 절벽 위의 추수가 끝난 논밭을 바라보고 싶다.

저 나무 뒤에 한탄강이 숨어 있다. 그 절벽위에 다시 논밭이 시치미를 떼고 펼쳐진다.
저 나무 뒤에 한탄강이 숨어 있다. 그 절벽위에 다시 논밭이 시치미를 떼고 펼쳐진다. ⓒ 이승열

대회산리 종점상회. 저 집 뒤 농로를 따라가면 굽이치는 한탄강이 숨겨져 있다.
대회산리 종점상회. 저 집 뒤 농로를 따라가면 굽이치는 한탄강이 숨겨져 있다. ⓒ 이승열
물론 남편의 비유대로 '그랜드캐니언'을 상상하고 떠났다면 100% 실망할 풍경이다. 대신 정다운 간판이 동네를 지키고, 누런 빛을 띤 벼들이 가을을 준비하고, 그 논 끝에 불현듯 절벽이 나타나고 그 아래 푸른 강물이 합쳐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몇 억 년 전 분출한 용암이 구멍 숭숭 뚫린 돌들을 길바닥에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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