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수월봉에서 절부암을 보고 있는 둘째 한바라.
ⓒ 김성희
지난 여름은 뜨거웠다. 아침 저녁으로 소슬한 바람에 움추러든 채 긴팔 옷을 꺼내입으면서 문득문득 지난 여름 햇빛에 하얗게 달궈져 있던 마라도 일주 도로와 그 너머 수평선 위로 아스라히 떠있던 산방산과 한라산이 생각나곤 한다.

아내는 마흔 살이 다가오는 게 여간 심란하지 않다고 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일상이 되풀이 되고 있고 또 어느새 자신과 키가 비슷하게 커 버린 큰 딸 아이를 바라보자니, 저 녀석들을 품에 안고 온전히 소통할 수 있는 나날이 이제 몇 년 안 남았구나 싶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여름 딸 둘과 엄마, 이렇게 셋이서만 국도를 따라 국토를 종단하는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다. 남자 빼고.

아내와 딸들은 직장에 한 달간 휴직계를 내고 8월 초에 텐트와 캠핑용품을 잔뜩 싣고 길을 떠났다. 일단은 집 앞을 지나는 3번 국도를 따라 국토를 종단하며 야영을 하겠다고 했다. 문경새재, 상주, 거창, 산청, 남해에서 하루 이틀씩 야영을 했다. 그리고 나의 여름 휴가 기간에 맞춰 고흥반도의 녹동항구에서 만나 페리호를 타고 제주로 들어가 5박6일 동안 텐트에서 잠을 자며 돌아보았다.

고흥반도의 끝에 있는 녹동항에서 열흘만에 만난 세 모녀는 검게 그을린 얼굴 때문인지 한층 더 씩씩해 보였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 둘째 역시 훨씬 더 눈빛이 깊어진 것 같았다. 이제 사춘기로 진입하고 있는 큰 아이는 몇 번 엄마와 다투고 삐치고 했지만 그래도 명랑해 보였다.

녹동에서 떠나는 제주행 페리호는 뭍에서 제주로 가는 가장 빠른 배편이다. 녹동을 떠난 지 3시간 30분만에 제주에 닿는다. 차종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지만 승용차를 배로 싣고 가는데 10만원 남짓, 어른의 운임은 1만8천원, 아이들은 반액이고 운전자 1인은 역시 반액으로 할인된 운임을 받았다. 우리들 계산으로는 네 가족이 제주에 가장 경제적으로 다녀올 수 있는 방법이고 또 야영장비를 싣고 가서 제주를 구석구석 돌아보기에도 적합한 방식이라고 여겨졌다.

소록도와 녹동항을 벗어나면 이내 제주도와 동의어인 한라산의 웅자가 보인다. 제주로 가는 서너 시간 동안 배에 탄 사람들이 줄곧 제주도를 바라보면서 한라산의 품안으로 안겨드는 식이다. 비행기에 타고 휙 날아갈 수도 있겠지만 천천히 바라보면서 깊이 안겨드는 이 방식이 제주도를 만나러 가는데 좀 차분하고 깊이가 있는 방식이라고 여겨졌다.

배에서 차를 몰고 항구에 내린 뒤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에 두어 번 가봤다고는 해도 출발지와 목적지가 명시된 교통수단에 실려 다녔을 뿐 스스로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 도달할 길을 찾아 차를 몰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몇 시간 바다를 건너와 육지에서 끊어진 국도가 다시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제주에 도착한 첫날은 탑동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관음사 야영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 산천단과 도깨비 도로를 거쳤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산천단이 제주시내에서 가까웠지만 옛날에는 어땠을까... 산천단은 한라산 정상에서 하늘에 올리던 제사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고초를 겪는 걸 막아보자고 산기슭에 따로 만든 제단이라고 했다.

▲ 윗세오름 오르는 길
ⓒ 김성희
관음사 야영장은 제주도의 북쪽 중산간 지대에 있었다. 관음사 등산로 입구에 벛꽃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야영장에는 샤워장과 취사장이 비교적 넉넉하게 갖춰져 있었다. 아내와 가스 램프를 켜고 버너로 밥을 짓는 동안 두 딸은 조잘거리면서 테이블에 앉아 방학숙제를 했다. 온 가족이 열흘만에 만나 처음 맞는 저녁식사라 제주에서 와인을 한 병 사와서 한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제주 여행 중 꼭 하루는 산행을 하기로 했다. 아내는 올 겨울 눈길을 뚫고 백록담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1월의 어느 날 모니터를 쳐다보며 눈이 뻐근하던 저녁, '눈보라 몰아치는 백록담을 내려다보고 있다오'하는 아내의 문자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차를 어리목 산장 앞에 세워두고 비교적 완만하게 시작되는 화강암 검붉은 대지의 숲길을 올랐다. 해발 1천3,4백 미터까지는 애써 흙을 살펴 보지 않는다면 딱히 육지의 여느 산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등산로가 이어졌다. 어리목쪽 등산로의 압권은 이 키큰 나무 숲을 벗어나 초원과 키낮은 나무들이 펼쳐진 고위평탄면부터였다.

지리산의 세석평전보다도 훨씬 더 광활하고 웅장한 풍경이 장쾌했다. 원시적인 웅장미가 느껴지는 백록담 화구벽도 그렇고 초원 너머로 아스라이 펼쳐지는 수평선, 그리고 맞닿아 있는 파란 하늘에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소백산도 그렇고 덕유산이나 지리산 같은 고산지대의 초원길을 걷다보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천국이 이런 곳을 모델로 했을 것이라 추측하게 한다. 초록의 초원과 파란 하늘이 양분하고 있는 눈 시린 풍경은 번잡한 일상의 시름을 잠시나마 깨끗이 잊게끔 해주었다.

어리목에서 해발 1700m 지점에 있는 윗세오름 산장까지 오른 뒤 영실기암 쪽 등산로를 통해 하산했다. 스펙터클한 고원 풍경에 들떠 있던 딸들이 조금씩 지쳐갔다. 산 아래 내려가면 자신들의 노고를 보상해 줄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기대로 스스로를 달래며 딸들은 인내하며 걸었다. 그러나 영실쪽 등산로 입구에서 또 다시 30분 이상을 걸어 내려가야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입구에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외면하고 지나치자 딸들은 낙담하며 항의했다. 못 들은 척하고 그냥 걸었다.

산행의 피로와 그만큼에 비례해 쌓여 있는 딸들의 불만을 해수욕장에서 달래주기로 했다. 딸들은 어리목 입구에 기다리게 해놓고 나는 또 다시 어리목 등산로 초입까지 걸어올라가 우리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햇볕에 달궈진 우리 차를 몰고 내려왔다. 제주시를 기준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제주도를 일주하기로 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우리가 가 닿은 곳은 한림항 옆에 있는 협재 해수욕장이었다.

투명한 하늘빛 바닷물과 잔잔한 파도, 육지의 여느곳과는 사뭇 다르게 하얗던 모래사장, 그리고 소나무 숲 아래 펼쳐진 야영장. 그곳에서 제주도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내기로 했다. 딸들이 물에 들어가 노는 동안, 나는 한림읍내의 재래시장에 가서 고등어 한보따리와 새우처럼 생긴 쏙 한 바구니를 각각 오천 원씩에 사와 숯불에 구워 먹었다. 저녁 만찬이 더할 나위 없이 풍성했다.

▲ 모슬포 가는 길, 절부암
ⓒ 김성희
제주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자전거로 제주를 일주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었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뙤약볕을 가르며 싱그럽게 페달을 밟고 있는 모습에서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젊음의 패기, 어떤 고난도 주눅 들게 하지 못할 젊음의 생명력 같은 게 느껴졌다. 제주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내내 그들을 보았다. 더러는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혹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뙤약볕에도 아랑곳없이 달려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품게 되었다.

협재에서 모슬포까지 가는 동안은 절부암과 수월봉에서 제주도의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파란 바다에서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포말에 무심한 듯 몸을 맡기고 있는 새카만 현무암. 바닥이 들여다 보이는 깨끗한 바다.

모슬포에서는 친구 Y의 무덤을 찾아 한 시간 남짓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모슬포가 집인 그는 뭍으로 유학 와서 대학에 다니던 80년대 말에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내가 처음 제주에 왔던 것도 그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은 남도 한라산이여~' 마석으로 갔던 그 무렵 학과 엠티에서 그는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르다 끝내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켜보던 우리도 함께 눈시울이 뜨거웠다. 눈이 맑고 말수가 적었던 그였다.

나는 사는 일이 모멸스러울 때마다 이십 대에 죽어버린 눈 맑은 친구들을 가끔씩 떠올린다. 그들이 살았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그들도 나처럼 자신에 대한 합리화와 변명이 늘었을까,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모슬포를 몇 바퀴 돌았지만 끝내 그의 무덤을 찾지 못했다. 내가 짐작하고 찾아들어간 마을 길들은 막다른 산길이나 군부대 정문에 막혀 있곤 했다.

▲ 마라도, 뜨겁게 달궈진 일주도로를 걷는 큰아이와 아내
ⓒ 김성희
제주도에서의 셋째 날, 마라도에 갔다. 모슬포 부둣가에 차를 세워두고 마라도행 삼영호에 몸을 실었다. 큰 배낭과 카고백에 매트리스, 침낭 등 장비를 실었다. 작은 고깃배 같은 삼영호는 손에 닿을 듯 떠 있는 마라도를 향해 한 시간 가까이 쪽빛 바다를 가로질러 갔다. 제주도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한라산과 산방산이 점점 넓은 화폭에 시원한 구도로 자리잡아갔다.

마라도는 납작한 접시처럼 수평선에 떠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연두색 초원만 보였다. 태양은 뜨거웠고 섬에는 그늘이 없었다. 초록의 사막 같았다. 아이들은 마라도의 자장면집에 대한 기대를 한껏 품고 있었다. 국토의 최남단 뗏목처럼 떠 있는 작은 섬에서 먹는 것이라는 것 말고는 마라도 자장면은 평범하고 비쌌다. 섬을 한 바퀴 걸어서 일주했다.

초콜릿 박물관 홍보관과 등대를 지나 마라분교까지 돌아오는데 40~50분쯤 걸렸다. 딸들은 또 다시 자신들의 이 고행이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한 것인가, 회의했다. 큰 딸 아이는 입이 댓발이나 나온 채 묻는 말에에도 대꾸를 않고 저만치 앞서 걸어가 버렸다. 이런 상태 때문에 우리는 바닷가의 팔각정에서 해가 이울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화상이 걱정될 만큼 해가 뜨거웠다. 딸아이들은 짐을 줄이느라 배에 탈 때 방학숙제할 책과 스케치북을 못 가져오게 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컸다.

두어 시간 남짓 대여섯 평 남짓한 팔각정 그늘에서 피신해 있자니 아이들은 이내 무료해졌다. 아내가 딸들에게 새로운 놀이를 제안했다. 넷이서 번갈아가며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자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첫 애를 낳고 나서 우리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얼마나 뚫어지게 보곤 했던지 모른다. 어느 밤엔가는 그 한없이 사랑스럽고 예쁜 모습을 아내와 내가 노트에 연필로 그린 적도 있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다. 가족의 얼굴을 그토록 절절한 애정과 관심으로 바라본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만 했다.

▲ 마라도에서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기로 했다. 둘째 아이는 뜻 대로 잘 안된다며 수줍어 했다
ⓒ 김성희
서로의 얼굴을 그리자니 서로의 얼굴을 골똘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둘째는 나의 얼굴을 그렸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몇 번 그리던 일을 포기했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실물보다 못한' 그러나 딸들이 말하기를 '그럼 아빠가 이렇게 생겼지 어떻게 생겼길 원해?' 하는 얼굴이 그려졌다.

마라분교 운동장가 풀밭에 텐트를 쳤다. 노을이 장관이었다. 마라도에 가기 한 달 전에 분교장님께 간곡히 부탁을 드린 끝에 지극히 예외적인 허락을 받았기에 가능한 야영이었다. 그분께 폐를 끼치지 않게끔 우리는 텐트의 팩을 박았던 흔적 말고는 단 하나의 쓰레기도 마라도에 남기지 않고 모조리 배낭에 싸가지고 나왔다.

▲ 마라도, 노을 속으로 두 딸이 산책을 나갔다. 텐트 밖으로 황홀한 노을이 번졌다.
ⓒ 김성희
마라도에는 유람선을 타고 온 관광객들이 썰물과 밀물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오후 4시 30분, 마지막 유람선이 섬을 떠나면 섬은 적막에 싸이지만, 섬 주민들은 그때부터 활기를 찾는 것 같았다. 가족들끼리 물놀이를 가고 관광객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밥상을 차리고 두세 명밖에 없는 분교 아이들도 운동장에 뛰어놀러 오는 것도 그 시간 이후였다.

마라분교도 83년까지만 해도 한 해에 15명 내외의 졸업생을 배출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한 해에 한 명 졸업생을 낼까 말까 할 정도였다. 교통이 편리해진 탓일까. 그 무렵부터 전국의 농촌 학교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대도시 주변을 제외하곤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지 않은 이런 풍경은 을씨년스럽고 불길하다.

텐트 밖으로 장엄한 노을이 졌다. 밤새 고기잡이배들이 켠 집어등이 수평선을 휘황하게 밝혔다. 설핏 잠이 들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일몰을 보기 위해서는 사오십 미터쯤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멀리 바다 건너에 떠올라 있는 한라산과 산방산이 현실감 없는 풍경처럼 여겨졌다. 해는 제주도의 오른 편, 동쪽 바다에서 떠올랐다.

▲ 마라도는 마지막 유람선이 떠난 오후 4시30분이 지나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다.
ⓒ 김성희
마라도에서 나오던 날 파도가 거셌다. 동쪽 선착장에 배를 대지 못해 반대쪽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서 위태롭게 출렁이는 배에 올라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마라도에서는 삿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풍랑이 거세져 제주로 못 나오게 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해안가의 '애기업개당'에 얽힌 전설과도 관련 있는 이야기였다. 애기업개는 먼 옛날 모슬포 해안가 부잣집에서 아이를 보던 종이었다. 험한 바닷길을 잠재우는 제물로 아무도 살지 않던 무인도인 마라도에 버려져 백골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큰 딸 아이는 자기가 전날 팔각정 기둥에 자기 이름을 낙서했다가 지운 일 때문에 파도가 거칠어졌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마라도 최남단에서 만난 돌탑. 누구의 열망일까. 앉아 쉬고 있는 새마저 예사롭지않았다.
ⓒ 김성희
마라도에 나와 딸들의 요구대로 모슬포 인근의 초콜릿 박물관에 들러 더위를 식혔다. 그리고 차를 몰아 서귀포로 향했다.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에서 두어 시간쯤 머물렀다.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자화상을 그려야 했던, 그림 속의 초췌한 그.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들과 아내와 끝내 살아서 만나지 못한 그 절절한 고독. 쌀이나 돈을 벌어오는 것 같은 현실에서는 무기력했던 예술적인 그의 천재.

이중섭이 '따뜻한 남쪽'을 그리며 가서 머물던 서귀포 그의 셋집. 그의 그림에 나오는 쑥섬도 미술관에서 내려다 보였다. 대학생 때 시를 가르치던 구상 선생은 우리들의 나태에 대해 "이중섭을 천재라고 하지만 일본의 그의 자취방은 데생 연습한 종이가 바닥에서 천장까지 가득 닿아 있었다. 그의 어린 아이같이 천진한 그림들은 그 혹독한 수련을 거친 끝에 나온 것"이라며 우리들의 가당찮은 방종을 꾸짖곤 하셨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산악인 김경옥씨를 표선면에서 만났다. 지난 겨울 아내가 제주 산악인들과 한라산을 등반할 때 만난 인연이었다. 그의 안내로 중산간 지대 모구리 야영장으로 향했다. 순수 민간 봉사기구인 제주 적십자 산악구조대 대원인 경옥씨는 며칠 전 제주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난사고 구조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군대생활, 그리고 용산 전자상가에서의 잠시 동안의 팍팍했던 객지 생활을 빼고는 줄곧, 제주도에서 살아온 그는 무공해 청년이었다. 그는 수십 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바비큐 불판과 얼음에 재운 맥주를 싣고와 우리를 황송하게 만들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아부오름에 올라 중산간 지대에 환상처럼 봉긋봉긋 솟아 있는 오름들을 바라보았다.

김경옥씨는 입도조(入島祖)로부터 35대손이라고 했다. 자신이 섬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다가도 섬을 집어 삼킬 듯한 태풍과 비바람이 몰아쳐 뱃길 하늘길이 다 끊길 때는 어떤 단절감 같은 게 느껴진다고 했다.

지난 오월에 이 세상을 떠난 사진가 김영갑씨의 갤러리 '두모악'은 표선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자고 나면 산간지대 초원에 새 길이 뚫리고 제주의 풍경들이 무너져 가는 게 안타까워 날이 새기 무섭게 카메라를 들고 그는 제주를 헤맸다.

그의 가난과 고독을 우리로서는 짐작만 할 뿐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내면에 끓어오르는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사진은 작가의 눈을 통해 새롭게 포착되는 세상의 이미지였고,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난과 굶주림과 모멸감과 고독의 밑바닥을 향해 무모하게 자신을 내려 보냈다.

그 때문일까. 그의 사진은 강렬했다.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들 앞에 서면 이상하게도 눈이나 머리 같은 이성이 아니라 피부나 심장 같은 어떤 물리적 감각이 자극 받는 느낌이 들었다. 제주에 오기 전에 내가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고 있는 모습을 지켜 봤던 큰 딸아이 역시,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두모악을 나서며 녀석도 "이 아저씨의 사진은 너무 외롭다"고 했다.

▲ 중산간 지대의 관음사 야영장. 야영에 익숙해지면서 딸들은 짐을 챙기고 텐트를 설치하는 일들을 스스로 거들었다.
ⓒ 김성희
섭지코지와 성산포를 거쳐 제주를 향해 나머지 원을 돌았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어찌 보낼 것인가에 대해 딸들은 거세게 자신들의 의견을 제출했다. 이제 텐트에서 자는 일이 지겹다고 했다. 엄마와 함께 야영한 기간까지 합치면 무려 십삼일 동안이나 야영을 한 셈이었다. 딸들의 요구처럼 굳이 야영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생각하며 제주를 향해 차를 몰았다.

제주시가 가까워 올수록 노을이 붉어졌다. 이왕이면 바닷가의 습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중산간 지대의 민박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해가 지고 저녁 이내가 깔린 1100도로를 따라 성판악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산간지대에는 민박집이 없었다. 이미 해는 저물었고 또 다시 해안가를 향해 내려가기에는 이미 모두가 너무 지쳐 있었다. "엄마 아빠가 충분히 아늑한 밤이 되게 해줄게." 이런 약속을 하고 첫날 머물렀던 관음사 야영장으로 향했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칭찬 릴레이를 하며 가스 램프 아래서 깔깔 대며 저녁을 먹었다. 엄마의 수고를 충분히 배려하고 걱정하는 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여행이 아이들에게 고생이었을지는 몰라도 정신의 근육을 강화한 데는 분명하게 기여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녹동으로 나오는 배는 저녁 여섯 시에 제주항을 떠난다. 제주에서의 한나절이 남았다. 이른 아침을 먹고 우리는 제주시내 동문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중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밀었다. 동문시장을 천천히 걸어서 구경한 뒤, 딸들은 문명의 혜택이 그립다며 제주 기적의 도서관에서 출항 시간까지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도서관에 있는 동안 아내와 나는 인터넷을 통해 조사해 둔 제주의 헌책방 '책밭'에 가서 제주도 헌책 구경을 했다. 뭍과는 다른, 제주만의 제주책을 구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별로 없었다.

헌책방에서 나와 제주 자연사 박물관을 들러보고 나니 얼핏 승선 수속을 해야 할 시간이 다 되어 갔다. 도서관에 가서 딸들을 데리고 부두로 가서 배를 차에 싣고 여객터미널에 앉아 지친 몸을 쉬고 있자니, 그저께 헤어졌던 제주의 사나이 김경옥씨가 불쑥 나타나 배 안에서 먹으라며 빵과 음료수 한 보따리를 안겨준다. 제주 시내에서 산악구조대 회의가 있어 나왔다가 배 시간이 다 된 것 같아서 들렀다며, 자신의 집에서 기르고 있는 레몬밤, 애플민트, 라벤터 같은 허브 잎 말린 차를 선물로 주었다. 우리가 그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귀찮은 민폐를 끼친 것밖에는 없었는데 그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따뜻했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해안도로에서 만나고 스쳐갔던 자전거 일주 젊은이들의 얼굴도 적지 않았다. 제주에서 고흥으로 나오는 배는 이제 반대로 멀리 하늘 위로 떠오른 한라산을 향해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을 흔들 듯 연기를 내뿜으며 섬에서 점점 멀어지며 어둠에 휩싸여 갔다. 날이 좋아 이날도 노을이 장관이었다. 노을이 지고 바다 위로 푸르스름한 이내가 번졌다. 뒤 이어 달이 뜨고 개밥바라기 샛별이 떠올랐다.

밤바다를 가로질러 삼등 객실에 페리호에 실려오며 딸들을 바라보자니 어쩐지 둘 다 한 뼘은 쑥 자란 것처럼 표정이 깊어졌다. 제주에 건너갈 때의 우리와 불과 5박6일 뒤 뭍으로 돌아오는 우리들은 어쩐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서로를 조금 더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한 달 휴직, 여자들끼리, 야영으로 국토 종단'이라는 아내의 결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여행이었다. 아마도 딸들은 한 해가 다르게 우리 품에서 벗어날 것이다. 생애 어느 순간에 또 다시 우리가 이토록 밀접한 감정으로 딸들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나볼 수 있겠는가.

▲ 제주를 떠나 녹동으로 오는 배는 한라산에 손수건을 흔들 듯 연기를 뿜으며 노을 불타는 바다를 건넌다.
ⓒ 김성희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사는 생명세상...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