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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쿠다니의 화산 연기
오와쿠다니의 화산 연기 ⓒ 박경
하코네는, 도쿄에서 오다큐센을 타고 한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화산지대다. 예전에는 교토와 에도(지금의 도쿄)를 잇는 험난한 육상로였는데 지금은 온천지대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도쿄에서 오다큐센을 타기 전에 하코네 프리패스를 샀다. 프리패스 하나 가지면, 스위치백 방식의 등산열차와 케이블카, 로프웨이를 차례로 갈아타고 오와쿠다니 자연연구로에 갈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로프웨이를 타고 아시 호수에 닿으면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하코네마치에 도착한다. 그리고 모토하코네를 거쳐 출발지로 돌아온다. 그 사이사이에 박물관이며 미술관들이 콕콕 박혀 있다. 말하자면 하코네를 통째로 관광지화한 것이다.

프리패스 하나만 있으면 3일 동안 하코네 안에서만 같은 회사의 탈 것들을 맘껏 탈수가 있다. 사실 1인당 5500엔(우리 돈 5만 원 정도)이라는 제법 비싼 값의 프리패스지만 한 이틀 있다 보면 공짜로 타는 것처럼 기분좋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난 일본 상술의 반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결코 싸지는 않다. 그러나 그걸 아깝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 아기자기하게 다양한 것들을 제공한다.

오와쿠다니의 온천수
오와쿠다니의 온천수 ⓒ 박경
지옥에서 극락을 맛보다

로프웨이를 타고 오와쿠다니에서 내려 걷는 동안 높은 산 운무처럼 피어나고 있는 화산 연기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길의 끝 무렵에는 검은 달걀을 파는 '극락'이라는 매점이 있었다. 그 옆에는 부글부글 온천물이 김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달걀은 80도 온천물에 삶은 것인데 노른자의 철분과 온천수의 유화수소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까맣게 변한 것이라고 한다. 그냥 온천수에 삶은 달걀이라고 하면 대개는 신기해서 사먹기도 하고 드물게는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으련만 이곳에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걸 사먹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 이유가 있으니 달걀에 소금을 살짝 쳤기 때문이다. 검은 달걀을 한 개 먹을 때마다 수명이 7년씩 늘어난다는데 그 누구라서 이 축복을 마다할 것인가.

온천물에 삶은 검은 계란
온천물에 삶은 검은 계란 ⓒ 박경
한 개, 두 개 … 흐억, 114살이나 살겠네? 딸에게 외치니 딸은 달걀의 효험을 정말 믿는 것인지, 한 개 더 먹으란다. 점심 먹은 지가 언젠데, 까딱하다간 수명연장은 고사하고 배터져 지레 죽을 판이다.

달걀을 까먹으면서 둘러보니 스르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오와쿠다니에서 만나는 최고의 경치는 로프웨이를 향해 달려드는 협곡도, 뭉글뭉글 피어나는 화산 연기도 아니다.

바로 이 모습! 오래 살겠다고 너도 나도 검은 달걀을 이 '화산지옥'에서 부지런히 까먹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야말로 장관(?)이었다.

오래 살면 뭐해, 적당히 살다 가야지, 라는 노인의 말을 순진하게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에 와볼 일이다.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이, 자손들에게 미안해 하는 염치있는 노인들의 겸손의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 호수의 유람선
아시 호수의 유람선 ⓒ 박경
온천에 녹고 친절에 녹고

날씨가 그다지 맑지 않아 후지산은커녕 호수와 산들의 색감조차 선명하게 볼 수 없었다. 모토하코네에서 버스를 타고 숙소를 잡아 놓은 하코네유모토로 돌아왔다.

도쿄 시내에서는 지하철을 타고 땅 속만을 다녔기에 모처럼 보이는 버스 창밖의 풍경은 여행의 덤처럼 느껴졌다. 스틸하우스 같은 일본 주택들을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 정원수를 가꾸고 있었다. 간혹 허리가 굽은 호호 할머니가 나뭇가지를 잘라 모양내며 다듬는 모습도 보였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적확하게 지적했듯이 자연보다는 인간의 손길이 먼저 느껴지는 게 일본 주택의 정원들이었다. 깎고 자른 인공의 미가 흐르고 넘쳐 자로 잰 듯 네모 반듯하거나 동그란 모양이 먼저 들어온다. 저것이 나무였지 하는 생각에 미치기까지는 시간이 잠깐 걸릴 지경이다.

사실 하코네 관광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아름답다는 하코네에서 하루종일 내가 즐긴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탈 것들이었다. 그 정도 경치로 따질 것 같으면 우리나라도 천지 '빼까리'다.

하늘빛보다 더 시린 물빛을 두른 가을 홍도, 붉은 진달래가 다투어 피어나는 봄의 세석 평전, 차르륵차르륵 소리마저 경쾌한 남해안의 몽돌 해변.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왠지 억울했다. 뭐야, 별 것도 없는데 여기저기 미술관 박아 놓고 로프웨이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교통비만 오만 원을 받아먹어? 우씨 억울한데 돈 도로 물러?

여기에 바로 일본 상술의 나머지 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것도 봐, 저것도 봐, 이건 어때, 저건 어때, 온갖 정성 다해서 홀려놓고 그래도 만족하지 못해서 내 돈 돌리도! 하면 군말없이 허리 굽히며 도로 다 물러줄 것만 같은 공손함. 그리하여 미안해서라도 다음에 다시 찾게 만들 것만 같은 감동의 서비스. 그런 그림자를 느꼈다는 말이다.

숙소로 돌아와 온천을 했다. 야외 온천을 겸한 아담하고 호젓한 곳이었다. 나무통 속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종일토록 혹사한 뼈마디가 스르르 녹는 듯 아릿했다. 온 몸의 마디마디가 열리고 한없이 이완되어 하강했던 선녀가 목욕을 마치고 잠자리 날개같은 옷자락을 나붓거리며 마악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가벼움을 느꼈다.

그렇게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뼈만 녹아나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어리버리 녹아버린 내 자신을 발견했다.

하코네의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 않고 도쿄에서 무작정 오다큐센을 탈 때 안내센터의 도우미는 엉망인 영어발음으로 두 번 세 번 당부를 했다. 하코네에 도착하면 숙소 먼저 잡아라, 만일 못 잡으면 꼭 도쿄로 돌아와야 한다는. 마치 길 떠나는 자식 걱정하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하코네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가족은 역에 있는 여행사부터 찾아 숙소를 예약했다. 어떤 곳을 원하느냐, 얼마짜리를 원하느냐, 여기는 마음에 드느냐 면서 호텔의 사진까지 보여 주었다. 호텔이 좋을까, 료칸(일본식 전통 여관)이 좋을까 주춤주춤 망설이다가, 마음에 든다 했다가, 아니 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시 찾아봐 달라는 우리 가족의 모든 요구를 한결같이 친절하게 들어주는 것이었다.

예약이 완료되는 순간까지 참으로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러고는 안내비를 오천 원 정도 받았는데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오히려 '다시 도쿄로 돌아가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가 목구멍까지 차오를 지경이었다.

버스 기사만 해도 그랬다. 하얀 셔츠를 단정하게 입은 기사가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승객들의 반복된 질문이나 행동에 친절하게 응하는 모습을 보니 자부심 하나만은 비행기 조종사 못지 않은 듯 싶었다.

버스는,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고, 지나갈 기척도 없는 한가로운 철길 앞에서 반드시 3초 정도 멈췄다가 출발했다(이 길은 다음날 두 번을 더 지나가게 되었는데 한결같았다).

대체 저렇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의 몸 속에, 그렇게 잔인하고 뻔뻔한 그네들 조상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저렇게 나긋나긋한 사람들이 한번 돌아서면 무섭게 변한다는 것도 4박 5일 동안 경험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도착해서 돌아다니는 내내 단 한번도, 단 한명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놀라운 일이었다.

또 바가지라는 게 없었다. 하코네가 유명한 관광지인데도 먹는 것이나 자는 곳이나 더 비싸게 받는 법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정해진 그대로, 속이는 법도 없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건 더 아니고, 더도 덜도 없이, 각진 도시락 속에 꼭 맞게 채워 넣은 것처럼 합리적인 듯도 하고 냉정한 듯도 하고.

그런데 분명한 건 여행하기에 아주 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건 따뜻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편하긴 하지만 따뜻하지는 않은 이 모순된 감정이야말로 일본여행이 줄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 아닐까 싶다.

밤하늘 먼 곳에서 별이 잠깐 반짝이는 듯했다. 온천을 하느라 벌거벗은 채 별을 보고 있자니 아득한 시원(始原)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어디를 가든 인공의 아름다움이 온천물처럼 흘러 넘치는 일본에서, 그날 밤 나는 멀고먼 원시의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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