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못한 <세계일보>와 <중앙일보>가 나섰다. 정치권의 국정감사 증인 채택 움직임을 두 신문은 "마구잡이" 또는 "망신주기"로 규정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 천정배 법무부 장관 등은 물론, 헌법상 내우외환의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는 재직 중 형사소추도 받지 않는 대통령까지 국감 증인으로 불러내려는 정치권의 행태는 "막가파식 정치공세"일 뿐이라는 게 두 신문의 비판이다.
개개 대상의 특수한 경우를 충분히 헤아린 뒤 판단할 일이긴 하지만 두 신문의 총론은 옳다. 어차피 채택되지도 않을 증인 후보 이름을 줄줄이 읽는 게 얼마나 생산적이겠는가.
그렇다 해도 가릴 건 가려야 한다. <중앙일보>는 정치권의 망신주기식 증인 채택 사례 가운데 하나로 이건희 회장 건을 끼워 넣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둘러싼 논쟁도 국감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희 증인채택은 국감 본질과 거리가 멀다? <중앙일보>, 가릴 건 가려야
<중앙일보>가 제기한 "국감 본질"이 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이건희 회장 건과 비슷한 사례로 축구협회 관계자들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한 것을 든 걸 보면 "국정이나 감사하지 왜 민간까지 감사하려 드느냐" 정도의 논리인 것 같다.
그럴 듯 해보이지만 기실은 구멍이 숭숭 뚫린 논리다. 이건희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하려는 상임위는 나름대로 근거를 대고 있다.
재경위에서는 재벌 금융보험사의 계열사 지분 초과 보유분을 강제처분토록 하는 내용의 금산법 개정안과 관련해 이건희 회장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초과 지분을 강제처분해야 한다는 열린우리당 안에 맞서 재경부가 끝까지 "강제처분은 안 된다"고 맞서는 배경에 삼성의 입김이 있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재경위 소속 의원들은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 로비 의혹, 삼성자동차 부실이 금융권에 미친 영향도 따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같이 정부 부처나 금융권이 연관돼 있는 문제다. 국정을 감사하기 위해 국정 상대의 증언이 필수적이란 얘기다.
그 뿐인가. 이번 정기국회 최대 쟁점인 X파일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건희 회장의 증언은 필수적이다.
공운영·박인회씨의 도청 녹취록 거래 시도 사실에서 밝혀진 국정원의 미온적 대처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거래 시도 사실을 국정원에 신고한 삼성의 증언은 필수적이다. 또 국가 공무원인 검사들이 삼성의 떡값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마당이니 떡값을 줬다는 사람을 통해 직접 확인하는 건 필수다.
해법없이 정치쇼 중계하는 언론... "왜 부르냐"가 아니라 "왜 못 부르냐"가 문제다
<중앙일보>는 이건희 회장 증인 채택을 두고 "최소한의 예의나 금도마저 잃어버린…망신주고 흠집 내려는 증인 채택"이라고 했지만 그게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반드시 불러야 하는 핵심적인 증인 채택"이다.
따라서 집중 제기해야 하는 문제는 "왜 이건희 회장을 부르려 하느냐"가 아니라 "왜 이건희 회장 하나 제대로 못 부르느냐"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중앙일보> 뿐 아니라 다른 언론도 이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 각 당의 '면피용 정치 쇼'를 중계할 뿐 해법은 모색하지 않고 있다. <중앙일보>의 말마따나 "이런 증인 채택 논란의 결말이 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해법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재경위, 법사위, 정보위 등등이 모두 나서 이건희 회장을 증인으로 불러야 하네 마네 싸우고 있지만 그 싸움은 결말이 뻔한 것이다.
여야가 서로 샅바 잡고 머리 들이밀고 버티기를 하는 동안 이건희 회장은 지난 4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밀진단을 받기 위해 미국에 갔다는 게 삼성의 설명이고 보면 이건희 회장이 국감이 끝나는 다음달 11일 이전에 귀국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건희 회장의 일방 행보에 열받은 국회가 국감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회장을 고발할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쉬워 보이지 않는다. 현행법은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았을 경우"로 고발 사유를 한정해 놓고 있다. 그럼 신병 치료는? 살기 위해 건강부터 챙겨야겠다는 주장을 압도하는 정당한 사유가 또 있을까?
어차피 깔기 어려운 멍석이고, 그래서 결말이 뻔한 '거품 빠진 쇼'인데도 언론의 묘사는 자못 긴장돼 있다. 해당 상임위 내의 샅바싸움을 매일 소상히 전하고 있다. 해당 상임위에서 여야가 합의하면 이건희 회장이 즉각 증언대에 설 것처럼….
국정조사나 청문회로 진실도 규명하고 이건희 회장 건강도 챙기자
이건희 회장이 국감 증언대에 서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면 정치권이나 언론 모두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상임위마다 물어야 할 게 널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미국으로 날아가 정밀검진을 받아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다. 그럼 국회의 '진실규명 의지'도 살리고 이건희 회장의 건강도 챙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게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금도"다.
그 방안이 뭘까? 민주노동당은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나 청문회 실시를 주장하고 있다. 어제 여야 의원 5명이 모여 만든 'X파일 공개 의원모임'도 이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여야가 청문회 실시에 합의한다면 실행방안은 얼마든지 유연하게 짤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정밀검진을 받을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할 수 있고, 상임위별로 중구난방식 중복 질문을 피할 수도 있다.
이게 <중앙일보>가 말한 "시정잡배의 싸움판"을 피하면서 "절제와 게임의 규칙을 지키"는 좋은 대안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