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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다가오니 괜히 마음이 짖궂은 날씨처럼 수시로 변덕입니다. 어렸을적 추석이야 추석빔에 햇과일 등 풍성한 먹거리들이 기다리는 반가운 명절이었고 청년기에는 지역의 문화를 일궈나가는 신명나는 때였습니다마는 오십줄에 가까이 다가가니 삶의 역정 속에서 명절이 두려운 시기가 되는가 봅니다.

일일이 다 인사를 닦자니 경제적인 여력의 한계가 있고 그냥 말자니 인간적인 섭섭함이 다가와 마음 속엔 이만저만 고민과 갈등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날은 그저 어디론가 떠나고픈 마음이 간절한데 담양군의 뉴스를 보니 우리 지역에 가시연꽃이 활짝 피었다는 보도가 눈에 띄네요.

옳다구나 하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세계적으로 일속 일종 밖에 없다는 가시연꽃 보러갈래?" 하는 그 말에 친구도 호기심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나옵니다. 싱그런 가을 들녘은 따가운 햇살 받아 풍요를 깊이 간직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저 뜨거운 땡볕 속에 알찬 가을의 결실이 있는 것이겠죠. 불볕더위와 싸워 만들어지는 곡식들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그저 우리는 세월이 가면 사과가 붉게 물들고 배가 익고 감이 익어가는 걸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익어가기 위해선 이런 뜨거운 햇살을 온몸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 활짝 핀 가시연꽃의 모습입니다.
ⓒ 이규현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는 듯 들녘에 벼들도 이제는 누렇게 변색되어가면서 결실을 향한 용트림을 힘차게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지역엔 태풍이나 집중호우가 없어 풍년농사의 물결이 아직까지는 일렁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쌀값하락으로 농사를 거두기 전부터 우리네 마음은 어둡기만 합니다.

그런 어둠 걷힐 날은 언제일까 푸른 하늘 보며 달리는데 벌써 현장에 도착입니다.

농사를 짓느라 계속 물을 공급한 까닭에 저수지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저보다 더 앞선 한 사람이 저수지에 들어가 열심히 촬영하고 있습니다.

▲ 가시연꽃 군락의 모습입니다. 이국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 이규현
모내기할 때 농민들이 신고 일하는 기다란 고무장화를 신고서 저수지 바닥을 헤매고 다니는 그 분을 보니 장화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맨발로 바지를 걷어올리고 들어가도 될 듯싶어 신발을 벗고 양말을 팽개치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뛰어내려 갑니다. 가까이에서 저렇게 활짝 핀 가시연꽃을 본 적이 없기에 마음은 급하기만 한데 아뿔사 진흙뻘에 중심을 잃은 몸은 앞으로 넘어져 카메라 렌즈가 흙으로 뒤범벅입니다.

에고, 마음을 좀 다스리고 긴 호흡하고 조심스레 내려와야 하는건데 하는 후회가 바로 나오고 이를 어쩌나 고민됩니다. 다행히도 필름 카메라는 버리고 디카는 양호한 상태입니다. 바지야 흙에 젖어도 다시 빨면 되는 거고 이왕 들어와 발에 흙을 묻힌 김에 디카만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부들 같은 수생식물 군락군을 지나니 발에 닿는 감촉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모내기를 할 적에 느꼈던 그런 감촉들이 추억을 되새겨주는데 발은 무릎까지 깊게 빠집니다. 중심을 잘못 잡으면 이 카메라마저도 망치게 됩니다.

▲ 아름다운 가시연꽃. 주름 가득한 잎들이 나중에는 점점 커져 넓은 잎을 만듭니다.
ⓒ 이규현
▲ 한뿌리에서 문어발처럼 무리지어 피어나는 가시연꽃
ⓒ 이규현
▲ 가시연꽃은 줄기와 꽃뿐만이 아니라 잎에도 가시가 있습니다.
ⓒ 이규현
조심스레 다가가 카메라 앵글에 가시연꽃과 입맞춤합니다. 문어발 같은 모습으로 대단히 이국적인 가시연꽃은 사전에 의하면 수련과(水蓮科 Nymphaeaceae)에 속하는 1년생 수초로 가시연꽃속(─屬 Eruylale)을 이루는 단 하나의 종(種)이라고 합니다.

다른 연꽃들과는 달리 씨앗에서 싹터 나오는 잎은 처음에는 작은 화살 모양이지만 점점 커지면서 둥그런 원반 모양을 이루며 가시가 달린 잎자루가 잎 한가운데에 달립니다. 잎의 지름은 20~120cm 정도이나 때때로 2m에 달하기도 한다고 하네요. 그래서인지 가시연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꽃들은 작고 아기자기한 게 많은데 유달리 이 꽃만은 넓은 잎으로 외래종이 혹 아닌가? 우리 꽃에도 이런 게 있었나 하는 의구심이 앞섭니다.

그런데 가시연꽃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곳이 그다지 많지 않아 환경부에서 희귀 및 멸종위기 보호식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답니다. 그런 귀한 꽃이 저희 지역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창녕우포 늪을 비롯하여 전북 임실, 충북 보은 등 몇몇 군데에서만 군락지가 발견된 가시연꽃은 그만큼 귀중한 우리의 자원입니다.

▲ 물위에 어리는 가시연꽃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 이규현
▲ 저렇게 넓은 잎을 뚫고서 꽃들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 이규현
그런데 담양의 가시연꽃 군락지는 몇 해 전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농업기반공사에서 저수지의 물을 더 많이 가두기 위해 준설공사를 하려다 가시연꽃 군락지임을 알고 항의하는 군민들의 목소리에 준설을 중단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이 귀한 자원이 사라져버릴 뻔한 사건 이후로 담양군은 이곳이 가시연꽃 군락지임을 알리는 입간판을 세웠습니다만 계속 밀려드는 토사와 급속하게 번져가는 수생식물 등으로 인해 가시연꽃의 삶의 터전이 점점 좁혀지고 있습니다.

가시연꽃은 다른 연꽃처럼 뿌리로 번식하는 게 아니라 씨앗으로 번식하기에 매년 발아가 되어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지 않으면 점차 소멸되어 멸종되어버리는 것이니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 가시연꽃 옆에 자그마한 잎이 보입니다. 저게 점점 자라서 커다란 잎이 됩니다.
ⓒ 이규현
아무튼 가시연꽃을 자세히 쳐다보면 정말 희한하기만 합니다. 어떻게 저 아름다운 보랏빛 꽃들이 온통 가시로 무장하여 "너희들 나 함부로 건들면 안 돼!" 하는 듯 스스로를 저리도 보호하고 있을까?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말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저렇게 아름다움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가시를 만들어내는 것인지 가시는 꽃과 줄기와 잎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 가시에 찔리면 도저히 뺄 수가 없다던 선배의 말이 떠올라 맨발로 내딛는 발걸음은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햇볕은 시샘을 하는지 구름에 가리웠다 말았다를 반복하여 사진촬영에 지장을 많이 줍니다. 조금만 노출이 달라도 가시연꽃의 아름다운 보랏빛이 날아가 버립니다.

저수지 뻘바닥을 기어다니며 가시연꽃과 만나느라 정신이 없다보니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것조차도 깜빡했습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정오가 훨씬 지났네요. 혼자만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아쉬움 속에 이제는 나가봐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 쪽의 생태환경이 양호한 것인지 족제비 같은 조그만 동물 한 마리가 내 앞에서 후다닥 사라집니다. 괜스레 잘 지내고 있는 그네들을 놀래켰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가득합니다.

그런 마음을 두고 돌아오는 길에 뻘흙으로 가득한 옷가지 가지고 가도 반가이 맞아줄 아내 생각에 살포시 미소가 머금어집니다. 풍성한 가을들녘처럼 내 마음도 풍요로워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멀티채널을 꿈꾸는 인터넷 담양신문 "담양저널(www.dyj.co.k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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