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순이(최진실 분)는 피해의식의 덩어리 그 자체다. 그녀의 옷은 비현실적일 만큼 촌스럽다. 여기에 백화점 직원들이 오해할 만큼 소비행태마저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린다.
친정 가족과 아이, 남편만을 위해서 억척같이 순하게 희생만한 맹순이에게 온갖 불행이 들이닥친다. 동생은 외면하고 아버지는 맹순이의 골치를 아프게 한다. 남편은 외도하다가 결국 자신을 버리고 이혼하자고 한다. 시댁에서는 시댁대로 맹순이에게 난리다. 맹순이를 내쫓고 새며느리를 들이려 한다.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데 사기까지 당한다. 여기에 위암까지 걸려 인생 자체가 허무해진다. 두부, 생선값을 악착같이 깎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억척 맹순이로 살아온 세월이 눈물과 울음으로 뒤범벅된다.
<두번째 프러포즈>와는 달리 대안적, 여성의 독자적 생활을 모색하지 않고 피해의식만을 강조하는 것은 드라마 수준을 뒤돌리는 것이다.
불행한 것은, 이러한 인물형은 2005년에 있다기보다는 대중의 의식 속에 상식적 관념으로 있다는 점이다. 현실적인 것 같지만, 비현실적인 인물형이고 이에 따라 <두번째 프러포즈>에서 보여주었던 편견적 상식의 변화된 지점들을 모두 무너뜨렸다. 드라마는 현실 같은 비현실적 캐릭터에 호소하고 시청률을 얻어냈지만, 드라마 지층 속 화석에 안주해버렸다.
이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통한 피해의식의 극대화에서 드러난다. 남자의 외도를 겪은 여인의 심리를 현실감 있게 그려냈지만, 거기엔 남성에 대한 미묘한 혐오가 배어 있다. 없을 수는 없는 인물형지만 바람을 피우는 반성문(손현주 분)뿐만 아니라 천원만(권해효 분) 역시 이성적으로 이해 못할 남자들이다.
맹영이(이태란 분)의 남자는 유부남이다. 그도 맹영이를 버려 비극성을 더한다. 문제는 그 중첩성과 여성에 대한 일방적 비이성성과 냉정함의 극대화다. 반성문은 악착같이 모아 장만한 집문서를 내놓으라고 한다. 곧 죽는다는 암시를 격하게 무시하는 무도한 남자일 뿐이다.
특히 맹순이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은 시댁의 인물들, 남편, 새 여자 등은 절대 악인들이다. <두번째 프러포즈>에서 보였던 새로운 사랑, 남편의 상대적 속사정과 사랑의 인정과 묘사는 무참하게 잘라 버렸다. 남자는 가해자, 여자는 피해자라는 구도는 최진실의 눈물 연기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마치 최진실의 실제 삶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은….
과연 이 드라마를 어느 층이 볼 것인가. 피해 의식에 동의하는 층이 중심이라면 시청자 포지셔닝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여성의 능동적인 독립성과 사랑 찾기에 대한 모색보다는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고 만다는 암시는 더더욱 편견적 상식에 의존하는 드라마의 한계를 보여준다. 피해의식과 불행의 중첩이라는 코드에만 의존한 예정된 결과다.
수백억 적자 공영방송 KBS의 어려움. 편견적 상식에 기초한 무난한 드라마의 쾌속 질주가 그 이유를 생각하게 한다. KBS를 구원할 드라마의 수준에서, 새로운 시도 없는 그러한 드라마들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공영성에 드리운 흑빛 인생의 암울이다.
덧붙이는 글 | gonews에 보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