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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인 9월 25일 저녁 베를린 시청에서는 공교롭게도 한국과 관련한 두 가지 상반된 행사가 있었다. 하나는 베를린에서 2년마다 개최되는 베를린 아태주간에 올해 한국이 주빈국가로 선정된 것에 즈음하여 황석영 작가의 작품 낭송회가 베를린 시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작가 황석영이 한국 문학을 이곳에서 열심히 알리고 있기 1시간여 전에 베를린 시청 앞 광장에서는 한국과 관련한 시위가 벌어졌다. 참가자들은 베를린 동남부 퀘페닉 구에 소재한 삼성SDI 독일법인에서 일하는 500여 명의 직원들.

시위 참가자들 앞에 선 하랄트 볼프(Harald Wolf) 베를린 시 경제장관의 말은 사뭇 비장하다.

"삼성은 우리가 싸움 없이 그냥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베를린 시 고위 관계자를 이리도 화나게 한 것일까? 삼성SDI 독일법인은 시위 전날인 21일, 2005년 12월 31일자로 베를린 소재 삼성SDI독일 법인 공장을 폐쇄하고 헝가리로 이동한다고 발표했다. 이유는 유럽 내 기존 브라운관의 수요 감소와 중국, 인도 등 저임금을 무기로 삼는 경쟁국 생산품과의 경쟁을 통한 가격 압박, 이로 말미암은 과잉 설비 및 가격 하락 문제, 그리고 LCD 등 차세대 상품의 수요 증가 등.

문제는 삼성SDI 독일 법인이 베를린 시와 유럽연합으로부터 1999년 말까지 약 3000만 유로(한화 약 370억)에 달하는 보조금을 받고 그 대가로 적어도 5년 간은 공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작업장을 운영해 왔는데, 그 조건이 만료되는 날짜가 하필이면 올해 12월 31일이라는 것.

500만이 넘는 기록적인 실업자 수를 달성한 독일에서 감원이나 공장철수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며 지난 주 끝난 총선에서도 이는 초미의 이슈였다. 더구나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조금을 수령하고 나서, 그 구속 조건이 만료되는 기일에 정확히 맞추어서 회사를 철수하겠다는 결정에 베를린 시 당국과 정치권, 노조 및 종업원들은 심한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는 상태이다.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 베를린 시장 또한 이 결정에 대해 충격을 받은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바로 얼마 전인 9월 초 IFA(오디오 영상 전시회)에서 공장의 미래에 대한 결정을 위해 아직 시간이 있다고 최고 경영자에게서 들었는데, 공장 철수에 대한 정보를 듣고 매우 놀랐다"며 이에 대해 반응했다.

놀라움과 분노는 보수에서 진보에 걸친 모든 베를린의 정당에 해당된다. 보수정당인 기독사회연합(CDU)의 니콜라스 찜머(Nicolas Zimmer) 베를린 시의회 원내총무는 보베라이트 시장에게 고용 보장을 "주요 사안"으로 다룰 것을 요구하고, 삼성SDI가 소재하고 있는 베를린 퀘페닉 지역구의 칼하인츠 놀테(Karlheinz Nolte) 사회민주당(SPD) 의원은 이 결정에 대해 "전혀 받아들일 수 없으며, 무책임하다"고 언급했다.

심지어 녹색당의 지빌 클로츠(Sibyll Klotz) 원내총무는 "삼성 법인이 공장을 철수하겠다는 결정을 계속 고수한다면, 모든 베를린 시민들과 기관들은 삼성 불매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 상태이다.

사실 기존 브라운관의 수요 감소나 새로운 시장의 창출 등은 몇 년 전부터 진작에 예견되어 온 상태. 그래서 800명에 달하는 삼성SDI 독일 법인의 직원들은 올해 4월부터 12%의 임금 삭감과 작업시간 단축, 여름 휴가비 등을 처음으로 반납하는 등의 조처를 실행함으로써 작업장 살리기 등의 노력에 동참해 온 와중에 750명 해고 결정은 더더욱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독일 노총(DGB)의 디터 숄츠(Dieter Scholz)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부장의 분노는 그래서 더더욱 크다. "수천만 유로의 보조금을 받아내고, 관련 분야의 투자에 소홀히 하고, 마침내는 종업원들이 이 경영실패의 결과를 모두 떠안아야 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기존 브라운관에 대한 수요 감소는 이전부터 충분히 예견되어 왔던 것이고, 그래서 새로운 전략 품목 개발과 이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정치권과 정책 담당부서 및 노조에서 누차 지적을 해 왔는데 이러한 제안과 조언에 대해서 삼성 측이 계속된 침묵과 무시로 일관하다가 갑자기 철수 결정을 내린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고 사회적으로 매우 무책임하다는 지적은, 숄츠 지부장이나 보베라이트 시장에게서나 반응의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반응이다.

이것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정이었다는 것은 베를린의 모든 이해관계 당사자들에게 해당된다. 2004년 8월 11일 베를린 삼성SDI 법인장과 베를린 기술경제전문대학(FHTW)간에 체결된 합의서에 의하면 2006년부터 FHTW 캠퍼스의 일부가 삼성 법인 소재지 내로 이동해서 학생 실습 등 산학협동을 강화하기로 합의가 된 상태이다.

볼프 경제장관은 삼성의 결정과 관련해 지원된 보조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는지 여부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면서, 회사와 일자리를 남게 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보베라이트 시장도 대화를 강조한 상태. 오는 월요일 삼성 측 관계자와 만나 일단 대화를 시작하기로 했지만, 베를린 공장을 계속 남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미지수이다.

전쟁 직후인 1945년 AEG 전자 연구소를 시발로 동독 시절 칼라 TV 브라운관 생산공장 소재지였다가 1993년 삼성SDI가 인수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전자제품 생산 단지였던 이 곳이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는지는 현재 초미의 관심사로 남아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할 경우, 이제까지 많은 홍보 비용을 들여 가꾼 유럽에서의 삼성의 이미지와 회사 신뢰도에 일정 부분 타격이 가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대해 삼성SDI 측은 독일법인의 브라운관 생산 경쟁력이 많이 떨어져 있어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삼성SDI 관계자는 "독일법인의 영업업무와 연구소는 계속 유지되고 생산업무만 중단되는 것"이라며 "현재는 생산 중단 시점만 발표한 상태고 앞으로 연말까지 시간이 남아있으니 보상급 지급, 재취업 지원 등 향후 대책에 대해서는 현지 노사협의회를 통해 협의를 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협의를 통해 생산 중단 시점이 연기될 수 있을지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방송(rbb)>, <베를리너 짜이퉁(Berliner Zeitung)>, <데어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 <디 타게스짜이퉁(Die Tageszeitung)>, <노이에스 도이치란트(Neues Deutschland)>, <디 벨트(Die Welt)>,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Berliner Morgenpost)> 등 베를린 소재 유수 언론사의 보도와 베를린 시 보도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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