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이 아닌 갇혀있는 물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도 소양호 인근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잇는 어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물빛 맑은 날 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 살던 동네, 자기 집 지붕이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그 느낌은 어떤 것일까.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해 물을 뺀 퇴수지에는 옛날엔 진상미가 나던 기름진 평야도 있었고, 또 인구 1000~2000명 정도의 성읍국가가 자리할 정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댐이 조성되기 전에 살았던 노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고인돌 같은 고대 유물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았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작가 오정희는 교환교수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2년쯤 머물던 것이 이 작품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교민사회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되었고, 그런 무력감은 귀국한 후에도 잘 낫지 않는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파로호 공사로 인해 선사시대 유적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왠지 모를 끌림으로 길을 나섰다고 한다.
파로호의 이승만 별장이 있던 곳 언저리에 있는 퇴수지를 찾은 혜순은, 그 속에서 40년간이나 물 속에 잠겨 있다가 물 빠질 때를 기다려 싹을 틔운 목화씨를 보며, 생명의 알 수 없는 조화를 공교로워 한다. 그래서였을까. 혜순이 귀국 후 걷는 행보는 미국에서 겪었던 문화적 갈등을 지우는 작업과 맥을 같이 한다. 그것은 귀국하자마자 증명사진을 찍거나 이천장에 이르는 소설을 꼬박 습자하는 행위로 추론할 수 있다.
어찌됐던 혜순은 발굴 현장에서 해독할 수 없는 암호인 듯 깊고 풍부한 표정을 간직한 돌을 바라보면서, 메마른 자궁에 새로운 생명의 물이 돌 듯 왕성한 창작의 봇물이 터질 것 같다는 예감에 빠졌는지 모른다.
"자기기만과 위선에 빠져 위태롭게 흔들리는 존재의 시원을
쓸어안는 파로호의 깊고 깊은 심연의 물결"
소설 속 탐사대장이 “백두산이 원산지인 흑요석은 선사인들이 소중히 여겼던 것으로 이동할 때는 반드시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이것의 발견경로에 따라 선사인들이 함경도 웅기에서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북한강 상류인 양구로, 다시 한강을 따라 금강 상류, 공주 석장리로 이동했다는 추론이 가능하게 되었지요”라는 말처럼 지금 양구는 국토정중앙이라는 지정학적 위치까지도 고려하여 대대적인 사업을 시작하고 있다.
월명리에는 선사시대 유적지 박물관이 건립되었고, 평화의 댐의 지척이자 파로호의 끝인 상무룡리에는 버섯 재배사와 민박집들이 늘어섰다. 일굴 땅이 없어졌으니 당연한 적응이겠지만, 민박집과 낚시터를 운영하는 마을주민은 ‘불황’이라는 또 다른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러나 파로호 상류의 물은 수정같이 고요하다. 그 옆으로 드문드문한 낚시꾼들이 한가로이 건져 올리는 것은 정작 오랜만에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평화로움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무시로 헬리콥터가 뜨고, 군용 트럭이 줄을 잇는 풍광은, "파로호는 '물 반 고기 반(水半魚半)'이고 양구는 '민반군반(民半軍半)'"이라는 말처럼, 구비구비 길을 돌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초소나 전적비, 출입금지의 팻말들은 양구를 둘러싼 산마저도 군복색 륙색을 걸쳐 입은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런 오랜 통제 때문에 양구는 오히려 농염한 생태의 원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병풍처럼 늘어선 대암산이나 용늪, 선사유적지, 안보전시관, 비무장지대의 원시림은 그것이 환경친화적이든 어떠하든 인간의 개입이 주는 파괴와 무위자연이라는 생명력의 대비를 확연하게 비춰준다.
지금은 국토정중앙으로서 평화와 상생을 화두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빛의 입구, 양구(陽口)이지만 아직도 길을 가다보면 ‘불쑥’하고 선사인들이 나타날 것 같다는 느낌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산과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로호의 심연 때문이리라…. 그것은 비단 작가 오정희의 작품세계뿐만이 아닌 현세의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생명의 시원으로 달음질 치고 싶은 우리의 마음 한 구석을 닮은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