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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달에 대한 단상(斷想)은 허전함이다(9.17 금산에서 촬영)
나의 달에 대한 단상(斷想)은 허전함이다(9.17 금산에서 촬영) ⓒ 김정봉
달항아리의 일부. 달을 너무 닮았다.
달항아리의 일부. 달을 너무 닮았다. ⓒ 김정봉
보름달을 연상시키듯 아름다우면서도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의 둥근 항아리를 우리는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무명 도공들은 어찌하여 이런 달 모양의 항아리를 만들 생각을 하였을까? 이들도 고향을 등지고 광주가마에서 일하다 일에 쫓기어 고향에 가지 못한 허전함을 이 항아리에 담으려 했던 건 아닐까.

달항아리 일부. 어머니의 젖가슴을 보듯 어루만지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달항아리 일부. 어머니의 젖가슴을 보듯 어루만지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 김정봉
그렇다면 성내고 슬퍼하기보다는 애달픈 마음을 누르고 오히려 흥겨운 마음으로 고향의 것, 그들이 살며 보아온 것들을 담아 허전함을 달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달항아리에는 우리의 것이 그대로 담겨 있는지 모른다.

동양삼국 도자기의 특징을 중국은 형태에서, 일본은 색채에서, 한국은 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중국도자기는 형태의 완벽성과 위엄, 일본도자기는 색채의 화사함과 장식성, 한국도자기는 가슴을 저미게 하는 곡선에서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중국도자기는 보기에 좋고, 일본도자기는 사용하기에 좋지만 한국도자기는 그것을 어루만지며 사랑하고 싶어진다 하였다(유홍준 문화재청장 특강-조선백자와 한국문화의 정체성 중에서 발췌).

이런 곡선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초가 지붕의 둥근 선,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는 저고리 배래선, 치마 단 아래 살짝 보이는 뽀얀 버선코, 불국사 대웅전 돌계단의 소맷돌, 부석사 안양루에서 볼 수 있는 겹겹이 쌓인 흐릿한 능선 등은 이런 곡선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순박한 미소와 신라수막새의 부드러운 미소는 형태의 완벽성과 위엄, 색채의 화사함과 거리가 먼 또 하나의 곡선미의 원류다.

초가지붕의 둥근 선-멀리 보이는 산과 닮아 있다
초가지붕의 둥근 선-멀리 보이는 산과 닮아 있다 ⓒ 김정봉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선생은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미술품에 표현된 '둥근 맛'이 한국적인 조형미의 특이한 체질의 하나여서 한국의 폭넓은 흰빛과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는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달항아리는 이런 곡선미의 완전한 표현물이다. 최순우 선생은 '백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없는 어진 마음의 본 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하였다.

달항아리-곡선미의 완전한 표현물
달항아리-곡선미의 완전한 표현물 ⓒ 김정봉
달항아리는 전통물레로 만들기 어려워 커다란 왕대접 두 개를 만들고 그것을 위아래로 이어 붙여 만드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런 연유로 모든 달항아리는 가운데 부분에 이어 붙인 자국이 있다.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면서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니고, 전체적인 형태는 아주 '둥그런' 것이 아니라 '둥그스레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여러 개를 굽다보면 이은 부분이 매끄럽고 거의 원에 가까운 잘생긴 놈도 있었겠지만 굳이 찌그러지고 거칠고 뒤틀린 것들을 파기하지 않고 살린 것을 보면 파기장은 과연 멋을 알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좀 못생긴 놈도 파기하지 않고 살려 준 것을 보면 파기장은 멋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좀 못생긴 놈도 파기하지 않고 살려 준 것을 보면 파기장은 멋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 김정봉
맑은 날에 보는 하얀 보름달 보다, 구름에 가리고 아직 덜 찬 누런 보름달이 더 멋있게 보인다. 최순우 선생의 말대로 비록 작가의식을 갖고 낳은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도공들의 흥겨운 마음에 따라 빚어 놓은 어리숙하고 순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는 18세기 중엽인 영조시대에 들어(1721년~1752년) 관영 자기소가 운영되던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처음 선보였고 1752년 이후에는 광주 분원 가마에서도 초기에 일부 제작되었지만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금사리는 달항아리의 고향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금사리의 가마터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마을 입구에 금사리임을 알리는 항아리 모양의 표지돌만 세워져 있다. 금사리는 팔당댐으로 인하여 수몰(1974년) 되기 직전까지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이 있었는데 이 하천에는 사금이 많이 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항아리의 고향 금사리는 항아리 모양의 표지돌로만 만날 수 있다
달항아리의 고향 금사리는 항아리 모양의 표지돌로만 만날 수 있다 ⓒ 김정봉
광주는 조선 자기의 본원지였다. 15세기엔 도마리ㆍ무갑리, 16세기엔 우산리ㆍ 번천리ㆍ관음리, 17세기엔 학동리ㆍ신대리, 18세기 초엔 금사리에서 구워지다가 1752년에 이르러 분원리에서 만들어졌다. 분원초등학교에 세워진 분원백자관 안에는 조선시대 광주지역의 가마터를 전등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그걸 보면 광주 일대가 붉게 물들어 마치 가마 불을 보는 것 같다. 과연 광주는 가마터의 고장이라 할 만하다.

가마터 지시등-과연 광주는 가마의 고장이라 할 만하다
가마터 지시등-과연 광주는 가마의 고장이라 할 만하다 ⓒ 김정봉
마지막으로 명맥을 유지한 분원가마 외에는 모두 야산에 덮여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지금 분원초등학교가 자리한 곳이 분원가마터였다. 다산의 생가가 물 건너에 있다. 팔당댐이 없었을 때에는 다산 생가 앞 소내섬까지 걸어서 건너 다녔다고 하니 다산도 이 곳 분원리에 들러, 가마 굽는 모습을 보았을지 모르겠다.

시골 초등학교는 어느 곳이나 이순신 장군 동상과 밝게 칠한 놀이터, 책을 읽는 하얀 소녀상이 있다. 여느 초등학교와 다른 건 분원백자관으로 향하는 언덕에 19명의 분원감독관의 공덕비가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이다. 이 공덕비를 보고 도공이 되려는 꿈을 꾸는 어린이가 있으면 반가운 일이다.

분원감독관의 공덕비
분원감독관의 공덕비 ⓒ 김정봉
예전에는 반짝거리고 발에 밟히는 것이 모두 도자기 조각이라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수거되어 백자관에 전시되었다. 이름 모를 무공들과의 연을 맺고자 여기저기를 살펴보아도 보이는 건 돌멩이 뿐이었다.

분원(分院)은 궁중의 부엌살림을 맡은 사옹원의 분원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사리 시대를 마감하고 생겨난 분원리 가마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왜사기에 밀려 경쟁력을 점차 잃게 되고 민간에게 이양되기 시작해 1894년에 관요로서의 임무를 끝내게 된다.

민간이 운영하던 분원가마 역시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20년에 가마는 폐쇄되고 더 이상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자관에서는 '아!분원'이라는 타이틀로 자료화면을 보여 주는데 흡사 분하여 일어나는 원망을 뜻하는 분원(忿怨)의 뉘앙스가 풍긴다.

분원백자관에 전시되어 있는 도편들
분원백자관에 전시되어 있는 도편들 ⓒ 김정봉
이런 아쉬움을 분원백자관이 덜어 준다. 분원백자관은 2003년에 분원초등학교의 사용하지 않은 언덕에 있는 교사를 개수하여 만들었다. 백자관 앞에는 분원감독관의 공덕비의 숫자만큼이나 되는 늘씬한 나무가 시원하게 서있고 건물 앞 공터에 간간이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정겹게 보인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구름이 잔뜩 끼어 달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매일 달이 떠 있다. 형편이 못되어 달항아리 대신 백자 달항아리 포스터를 한 장 구입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았다. 보고 또 보고 '순정 어린 백색의 조화와 어진 둥근 맛'을 느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백자 달항아리전(국립고궁박물관 8.15-9.25 )에 다녀와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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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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