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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신임 대법원장이 사법부 과거사 청산 의지를 분명히하자, 조중동이 일제히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지난 26일 대법원에서 열린 제14대 대법원장 취임 축하연에 참석해 이 대법원장이 건배 제의를 하고 있는 사진.
이용훈 신임 대법원장이 사법부 과거사 청산 의지를 분명히하자, 조중동이 일제히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지난 26일 대법원에서 열린 제14대 대법원장 취임 축하연에 참석해 이 대법원장이 건배 제의를 하고 있는 사진. ⓒ 오마이뉴스 남소연
조·중·동의 우려가 적지 않다. 대법원이 72년부터 87년까지의 시국·공안사건 판결자료 수집에 나서자 조·중·동은 '이용훈 사법부'가 "중요한 시험대에 올랐다"(<동아>)며 파장을 염려하고 나섰다.

조·중·동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건 '외풍'이다. "이 정권 들어 유행되고 있는 과거 청산의 구호에 맞춘 정치적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중앙>)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주문을 내놓았다.

"판결검토기구에 외부 인사를 배제해 정치·사회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는 사법부 손에 맡겨야 한다."<중앙일보>
"이 대법원장은 정치권력과 주변단체 쪽에서 불어오는 외풍으로부터 사법부의 안정과 독립을 지켜낼 책무가 있다." <동아일보>

조·중·동의 이런 '주문'엔 하나의 전제가 깔려있다. 대법원의 시국·공안사건 판결자료 수집을 과거사 정리로 규정하고, 그런 작업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조·중·동 모두 독재정권의 지시와 압력에 굴복했던 사법부의 떳떳치 못한 과거를 인정하면서 그 대표적 사례로 '사법 살인'이라 불리는 1975년의 인혁당 사건 판결을 들었다.

의문은 여기서 싹튼다. 조·중·동이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사법부의 독립성 훼손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이유가 뭘까?

조·중·동이 제시한 이유는 재판권 훼손이다.

"법원의 판결은 법관이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내려야 하는 것"(<중앙>)인데도 "법관이 판결 당시의 시행 법률과 국가적·시대적 상황을 감안해 내린 결정을 지금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법관의 재판권을 흔들어 거꾸로 사법부 독립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조선>)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조·중·동의 우려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조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합하면, "헌법기관인 법관의 독립적인 재판권을 외부세력이 훼손해서는 안 된다" 쯤이 될 것이다.

정찰제·반타작 판결 인정했던 조·중·동, 실제로는 부정

이용훈 대법원장의 과거사 청산 발언으로 사법부의 독립성이 흔들리고 인정 청산론이 제기될 것이 뻔하다고 우려하고 있는 <조선> 30일자 사설.
이용훈 대법원장의 과거사 청산 발언으로 사법부의 독립성이 흔들리고 인정 청산론이 제기될 것이 뻔하다고 우려하고 있는 <조선> 30일자 사설.
하지만 이 논리구조는 맹점을 안고 있다. 조·중·동은 사법부 과거사 정리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사법부를 이렇게 질타한 바 있다.

"지난 시절 사법부가 오직 헌법·법률·양심에 따르기보다는 정권의 지시와 압력에 굴복한 판결을 내린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우리 사법부는 독재·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약자의 외침엔 귀를 막았다는 비판을 들어왔다." <중앙일보>
"정치권력과 정보기관의 주문에 따른 '정찰제 판결' 도는 '반타작 판결'의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동아일보>

조·중·동 스스로 사법부가 독재정권 하에서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린 건 아니라고 꾸짖고 나서는 몇 줄 뒤에 가서 "왜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법관의 재판권을 훼손하려 하느냐"고 따져 묻고 있다.

<한겨레> 사설 한 구절처럼 "사법부가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면 지금 과거사 청산문제를 논의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란 반론이 튀어나올 형국이지만 일단 참자. 백번 양보해서 외부세력의 사법부 훼손을 지극히 염려해서 나온 '잔소리'이겠거니 하자.

하지만 이 대목에 와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는 "사법권은 사법부 바깥뿐 아니라 내부의 압력·지시·명령으로부터도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리하자면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내린 판결은 내·외부를 가릴 것 없이 '접근금지' '촉수엄금'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결국 다음 수순을 향할 수밖에 없다. "대법원이 뭔데 헌법기관인 법관의 독립성을 해치려 하느냐"는 주장 말이다.

말로는 사법부 과거사 정리를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부정하는 '이중주'가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께름칙하다. 조·중·동의 핵심주장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조·중·동은 사설의 결론부에서 "그럼에도 사법부가 굳이 스스로 과거 청산 작업을 벌이겠다면" 다음 두 가지를 경계하라고 주문했다.

"판결 검토기구에 외부 인사를 배제해 정치·사회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선일보>
"사법부를 떠난 인사들에 대한 부관참시나 사법부 내의 인적 청산 등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 <중앙일보>

인정 청산 않겠다는데, 웬 인적 청산 우려?

<중앙>은 30일자 2면 상자기사를 통해 천정배 법무장관이 며칠 전 한 사석 모임에서 4명의 법조인을 거명하면서 이중 세 명은 대법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중앙>은 30일자 2면 상자기사를 통해 천정배 법무장관이 며칠 전 한 사석 모임에서 4명의 법조인을 거명하면서 이중 세 명은 대법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번엔 이백 번 양보하자. 조·중·동의 주문을 '고언' 쯤으로 귀담아 들어보자. 그럼 남는 문제는 하나다. 대법원은 정말 외부세력과 연계해 인적 청산에 나서려 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오"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지난 26일 취임식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재심 기회 확대는 판결에 의해 결정할 문제이고 ▲잘못된 판결에 연루된 인사들을 청산하는 문제는 이미 대부분 당사자들이 법원을 나간 상태이며 ▲외부위원회 구성을 통한 진상조사는 사법권 독립을 저해할 소지가 있어 적절치 않다."

사법부의 최고 수장이 이렇게 선을 긋고 나온 마당에 도대체 뭘 우려하고 뭘 주문하겠다는 것인가. 정작 우려해야 할 건 외부세력과 연계한 인적 청산이 아니다. 대법원장의 이 정도 계획을 정말 과거사 정리로 평가절상할 수 있겠느냐부터 따져봐야 한다.

<한겨레>의 말마따나 이 정도 수준이라면 "과거사 청산 작업의 본격화로 해석하기는 힘들"며 "이용훈 신임 대법원장의 말대로 '과거 사건판결의 흐름을 살펴보는' 첫걸음에 불과"하다.

조·중·동도 인정한대로 과거 사법부가 독재정권의 지시와 압력에 굴복해 '정찰제 판결' '반타작 판결'을 남발했다면 사법부를 향해 달리 주문해야 한다. "그 정도로는 안 되겠다"고 질타해야 한다.

배심제니 참심제니 하며 일반 국민의 사법 참여가 적극 검토되고 있는 마당에 왜 외부인은 사법부의 그릇된 과거를 평가하면 안 되는가? 3심제뿐만 아니라 재심의 길(물론 바늘구멍이지만)까지 열어놓는 이유가 법관의 판단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인데 왜 법관의 무오류성·국민의 오류성을 전제로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는가?

왜 법관의 무오류성·국민의 오류성 전제로 외부 접근 차단하나

<동아>는 여권이 '재심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30일 보도하면서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론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동아>는 여권이 '재심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30일 보도하면서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론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6공의 황태자였던 박철언씨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대법원장 후보라는 사람이 일개 청와대 비서관 앞에서 면접을 보면서 "저를 임명해주시면 조직을 움직여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는 요지로 '포부'를 밝혔다고 한다.

단지 법리 해석을 잘못해 그릇된 판결을 내린 법관이 아니라 독재정권에 적극적으로 부화뇌동하면서 재판권을 출세의 수단으로 악용한 법관의 행위까지 무조건 불문에 붙여야 하는가? 그런 행위가 헌법이 정한 "오직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법관의 품위와 윤리, 위상을 저해한 것이라면 단죄하는 게 마땅한 일 아닌가?

또 한 번 양보하자. 이번엔 삼백 번이다. 조·중·동이 고교 수준의 이런 상식을 몰랐을 리는 없다. 국가 일급기밀을 다루는 국정원과 국방부마저 민간인과 함께 과거사 진상조사위를 구성한 마당에 오로지 사법부에 한해서만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건 누가 봐도 과잉 주장이다. 조·중·동이 진짜 염려하는 건 뭘까?

눈길을 끄는 두 가지 뉴스가 오늘자 조간에 실렸다. <동아일보>는 여권이 '재심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바늘구멍 같은 재심의 길을 넓혀 그릇된 판결을 바로 잡자는 취지라고 한다.

<중앙일보>는 천정배 법무장관이 며칠 전 한 사석 모임에서 4명의 법조인을 거명하면서 이중 세 명은 대법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조만간 이용훈 대법원장이 대법관 3명의 임명을 제청할 것이란 보도 직후에 나온 뉴스다.

두 뉴스를 종합하면 사법부의 격변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재심 특별법'은 사법부의 과거 행적을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며, 새 대법관들은 그런 작업의 조타수로서, 또 미래의 판결을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제 역할을 할 것이다(천정배 장관의 ‘소망’이 적절한 것이며, 또 이용훈 대법원장에 의해 수용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별개다).

여기서 한가지 그림이 그려진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새 대법관 후보로 사법 개혁의지가 높은 외부 인사를 적극 제청할 경우, 그리고 그 대법관들이 재심을 주도할 경우 어떤 상황이 연출될까?

조·중·동이 진짜 염려하는 건 바로 이런 상황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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