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언 땅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을 보자 토마스는 집에 있을 스케이트가 생각났다. 제대로 갖추어진 침실과 욕조를 보고 전쟁전 일상이 떠오른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따뜻한 집과 깨끗한 이불, 가족을 위해 만들어진 소박한 음식이 주는 안락함과 평화로움이 토마스에게도 있었다.
토마스의 아버지는 2차 대전에 참전해 전사한다. 엄마와 함께 피난열차를 타려했지만 많은 인파에 휩쓸려 헤어지게 된다. 토마스는 혼자서 엄마와 함께 가려던 이모 집을 찾아 빈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모 집이 있어야 할 헬러가 9번지엔 낯선 아주머니가 앉아 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어디로 갈 셈이냐?"
"사실은 반다 이모를 찾아갈 생각이었거든요."
아주머니는 웃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흔들면 웃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찍어 냈다.
"그 '사실은'이라는 말이 너무 우스워서 그랬다.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말이 너무 많아. 그 말 한마디로 참혹한 이 현실이 다 표현된 것 같구나. 사실은 나도 집에 편안히 앉아 남편인 크루제 대위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지. 그리고 사실은 너하고 내가 여기에서 만날 이유가 없었지. 사실은 내가 너를 더 친절하게 대해 줘야만 했지..."
전쟁 속에서 고아가 된 토마스에게 거칠게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토마스가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은 비좁고 더러운 공간이나마 내어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외다리 사나이 크뤽케를 보자 주저 없이 그를 따라간다. 이 외다리 사내가 어디에 가면 먹을 만한 햄이나 빵이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아챈 것이다. 집 없는 떠돌이 생활에서 얻어진 지혜라고나 할까,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서 비롯된다.
토마스의 짐작대로 크뤽케는 전쟁에서 한 쪽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지만 수단이 좋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안정된 숙식을 제공받게 되었고, 마지막엔 토마스가 엄마를 찾을 수 있게 한다. 돼지와 페르시아제 카펫을 맞바꾸는 거래에서 중 돼지 대신 새끼 돼지를 받았지만 크뤽케가 건네 카펫도 사실은 가짜였다. 크뤽케는 독백처럼 말을 한다.
"그래, 우리도 타락했지."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속는 것에 익숙할 정도로 타락해버린, 반 나치스트 크뤽케는 이젠 더 이상 도덕적 가치에 민감해 하지 않는다.
국제 적십자사에서 가족을 찾으려고 서류를 접수하는 길고 긴 줄을 바라보며 크뤽케는 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야. 어머니는 자식을 찾고, 아내는 남편을 찾고, 아이들은 부모를 찾겠지. 이 모든 것이 '위대한 지도자(히틀러)'께서 세계의 절반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생겨난 일들이지."
사실은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따뜻한 저녁을 함께 했어야 했다. 사실은 늦잠자는 아이를 엄마가 애써 깨워야 했다. 사실은 크뤽케와 토마스는 평생 모르는 사이여야 했다.
토마스와 크뤽케는 빈에서 독일로 돌아온다. 그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동물 우리를 방불케 하는 끔찍한 기차여행과 수용소 생활을 견디어 냈다. 겨우 도착한 그들의 정착지 풍경을 바라보며 크뤽케는 말문을 연다.
"토마스, 우리가 지금 도대체 어는 별에 와 있는 거야. 지금이 어느 시대지?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총을 쏘지 않았었나? 가축 우리 같은 곳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인간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었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시내로 들어와 봤더니 우리를 마치 페스트처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대문을 꼭꼭 닫아걸고는 우리를 보려고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어. 그러면서 교회에 모여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다니!"
헤르틀링 작품 속 어른들은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다. 크뤽케 역시 비록 외다리에 전쟁 떠돌이지만 자신의 처지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았다. 크뤽케는 새로운 정착지인 바그너 부인의 다락방에서 토마스를 위해, 또한 자신을 위해 정성껏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 그리고 아래층에 내려가 가족이 모두 함께 있는 바그너 부인에게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라는 인사를 한다.
크뤽케는 바그너 가족에게 불쌍하고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토마스가 명절에 슬픈 얼굴을 하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바그너 부인은 그들의 크리스마스 인사에 당황했지만 과자가 잔뜩 담긴 접시를 토마스에게 건네 준다.
"바그너 부인은 마음씨가 괜찮은 사람일 거야. 단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잔재인 우리들이 이 집에 들어와 살아야 하는 현실이 문제지. 그러니 우리를 따뜻하게 환영해 달라고까지 요구할 수는 없어."
헤르틀링은 작품속 주인공을 극한 상황이나 비극적인 현실에 고립시키지 않는다.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기관이나 개인에게 당당히 도움을 청한다. 혼자의 힘으로 어려우면 여럿이 힘을 모은다. 절대로 사회에서 낙오시키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만들지 않는다.
| | 작가 페터 헤르틀링 | | | | 페터 헤르틀링 (Peter Ha"rtling) - 1933년 독일 켐니츠에서 태어나 시, 단편, 장편, 에세이에 걸쳐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76년 독일 청소년 문학상과 1980년 스위스 취리히 청소년 문학상, 2001년 독일 청소년 문학상 특별상을 받았으며, <크뤽케>는 영화로 제작되어 헤센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히르벨>, <할머니>, <테오 도망치다>, <존 할아버지>, <파란 문 뒤의 야콥>, <우리 가족>, <아이들을 위한 동화>, <프란츠>, <지붕 위의 레나>, <크뤽케> 등이 있다. / 사계절 | | | | | |
독재자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황폐해졌지만 개인간의 오가는 정이 살아있어 토마스는 무사히 살아남는다. 토마스는 엄마를 찾으려고 처절하게 매달리지 않는다. 우연히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토마스에겐 엄마를 만나기 전에 당장 살아 나가야하는 현실이 중요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어린아이들은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한다. 크뤽케와 같이 육체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따뜻한 이웃이 있고, 건강한 정신을 갖은 어른이 있으며, 공공기관에서 제 역할을 해주는 그래서 불행에 처한 한 아이를 구원해 내는 것이 헤르틀링의 작품들이다.
누군가가 아이들을 위해 어떤 소설이 나오길 바라느냐고 내게 물으면 이렇게 말하겠다.
"페터 헤르틀링 작품들을 읽어보세요. 우리는 도움을 주고받을 줄 몰라요. 어려움에 처했을 땐 당당히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제 성냥불이나 켜다가 죽어가서는 안됩니다. 상상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 나가야 합니다. 스스로를 지켜내고 자신도 사회에 일원으로서 행복해야 한다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도록 생각을 돕는 책이 필요합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명 : 크뤽케
저 자 : 페터 헤르틀링
출판사 : 사계절
페터 헤르틀링의 작품 매력있어요.
리더스 가이드와 알라딘에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