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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오래 오래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내 아버지
내 아버지. 오래 오래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내 아버지 ⓒ 장희용
8년 전 이맘때 저는 제 인생에서 아주 힘든 시기를 맞았었습니다.

고혈압으로 20년 넘게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비료작업을 하다 말고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고통을 호소하신 것입니다. 동네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아무래도 심장이 이상한 듯하다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심장', '큰 병원'이라는 말에 고개부터 저으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됐다면서 병원조차 가지 않으시려 했습니다. 형과 저, 누나들이 며칠 내내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굽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형님은 "아버지 맘대로 하시라"는 속상한 한마디를 남기고 서울로 올라갔고, 누님은 "아버지가 달리 생각하시는 게 있는 것 같다"면서 눈시울만 적시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내 눈앞에 이렇게 아버지가 숨쉬고 계신데 저렇게 두 눈 뜨고 나를 바라보고 계신데 그냥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본심이 아니었으면서도, "형이나 누나들이 쌀이나 갖다 먹을 줄 알았지, 언제 모내기 할 때 한번이라도 와서 일한 적 있느냐" "아픈 아버지가 등에 볏가마니 지고 나를 때 한번이라도 와서 일한 적 있느냐"고 형과 누나들에게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혹시 돈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내가 아버지 병원에 모셔 가겠다", "혼자서라도 아버지 수술시켜 드려서 낫게 할 거다"라고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면서 매정하게 몰아세웠습니다.

나는 그 길로 밤에 차를 몰아 시골에 계신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그냥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아버지, 자식들 소원이니 제발 병원에 가세요"

"아버지 병원에 가세요. 왜 안 간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사실만큼 사셨으니 아버지는 여한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제 눈앞에 이렇게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이런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데, 하루 빨리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데 자식 된 도리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 만약에 아버지 잘못되면 병원 한번 못 가보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저나 형, 누나들 평생 한으로 남을 겁니다. 자식들 소원이니 제발 병원 가세요."

무릎 꿇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만 계셨습니다. 당신은 살 만큼 살았다는 말씀을 하시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병원에 가시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돌아가시더라도 병원에서 돌아가세요. 그래야 자식들 불효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은 받지 않을 거 아니에요. 아버지 이대로 돌아가시면, 저 놈들은 자기 아버지가 아프다는데 돈이 없나 뭐가 없나 병원도 안 모셔갔다고, 천하에 불효자식이라고 욕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식들 욕 안 먹이려면 돌아가시더라도 병원에서 돌아가세요."

제 입에서는 차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까지 튀어나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습니다. 자고 아침에 가라는 어머니 손을 차갑게 뿌리치고는 인사도 없이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습니다.

자꾸만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훔치고 또 훔쳐도 눈물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엉엉 소리 내어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한 평생 고생하신 우리 아버지, 불쌍하신 우리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한참을 차 안에 있었습니다.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게 뿌리치고 왔으니 어머니는 이 자식이 무사히 잘 갔는지 밤을 뜬 눈으로 새울 것 같아 내키지 않는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받더군요. 갑자기 눈물이 또다시 쏟아지더군요.

"아버지... 병원 가요."
"그래 가자. 네 말대로 병원 가자."

여전히 아프시지만 이나마 건강하신 것이 다행입니다
여전히 아프시지만 이나마 건강하신 것이 다행입니다 ⓒ 장희용
"아버지, 돌아가시더라도 병원에서..."

저는 곧바로 형님한테 전화를 했고, 형님이 살고 있는 안산 고대병원에 예약을 했습니다. 수술하더라도 살 수 있는 확률은 50%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자식 넷 모두가 수술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뒤에 아버지는 수술대에 오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심장 인공판막 이식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수술 도중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말에 아버지는 식구를 다 부르시고는 마지막 당부를 하셨습니다. 유언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죽어도 천수를 누린 것이니 슬퍼하지 말거라.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서로 아끼면서 우애 있게 지내야 한다. 그리고 니 어머니, 아버지가 잘못되거든 엄마가 고집부리더라도 절대로 시골에 혼자 있게 하지 말거라. 희두 네가 아버지 장례 끝나는 그날로 엄마 모셔가거라. 절대로 네 엄마 시골에 혼자 있게 해선 안 된다."

아버지는 형님과 누나, 매형들에게 차례로 말씀하시고는 마지막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희용아, 이리 오너라. 아버지야 살만큼 살았으니 여한이 없고, 네 누나들이나 형은 다 결혼을 시켰으니 걱정이 덜 된다만 너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구나. 부모가 돼서 자식 결혼까지 시켜야 부모 할 일을 다 하는 것인데, 너 결혼시키지 못한 채 아버지가 잘못될까봐 마음이 아프구나. 희용아, 넌 어릴 적부터 부모 속 한번 안 썩이고 잘 했으니 이 아버지가 없더라도 잘 살아야 된다. 우리 막내, 아버지 엄마가 일만 하느라 엄마 젖도 제대로 못 먹였..."

거기까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시고는 끝끝내 참았던 눈물을 자식들 앞에서 보이셨습니다. 검버섯이 잔뜩 핀 아버지의 마른 손등에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닦아도 닦아도 아버지 손으로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버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서러움, 슬픔 등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제 가슴을 후벼댔습니다. 아버지가 수술하시는 동안, 아마 제 삶에서 그 때만큼 삶의 고통을 당한 시간은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세린이. 아버지, 세린이 시집 갈 때까지 사셔야죠.
아버지와 세린이. 아버지, 세린이 시집 갈 때까지 사셔야죠. ⓒ 장희용
한참 후에 열린 수술실 문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수술실 문이 열렸습니다. 내 눈은 자동으로 의사 얼굴로 향했습니다. 밝은 표정입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저절로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살았다는 기쁨에 나온 소리였습니다. 의사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수술을 끝내고 나오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살아주셔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또 눈물이 나왔지만 슬프지도,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데요. 눈물은 나왔지만 제 얼굴은 웃었으니까요.

수술 후 아버지는 한참을 병원에 입원했다가 시골로 내려오셨습니다. 처음에는 가슴을 절개해 수술한 탓인지 힘들어 하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셨고 지금은 가벼운 농사일도 하십니다.

나중에 아버지한테 웃으면서 그 때 왜 병원 안 가시려고 했냐고 여쭤봤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그것이 걱정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살만큼 살았는데 수술해서 낫는다는 보장도 없고, 설령 낫는다고 해도 이미 다된 몸인데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자식들한테 짐을 남기겠냐고 하셨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심장수술이라는 것에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시고는, 그 수술비용을 마련해야 하는 자식들을 걱정하신 거였습니다. 혹여 당신을 살리기 위한 수술비 때문에 자식들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될까 걱정하신 겁니다.

당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리면서까지 자식을 지키려 하신 아버지. 오늘 그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부모의 자식 사랑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오늘 무슨 날인지 아세요?"
"글쎄다. 왜, 무슨 일 있냐?"
"아니요. 그냥."

오늘이 아버지 수술하셨던 날이라고 말을 할까 했지만 괜히 아버지에게 아픈 날일 것 같아 그냥 끊었습니다. 수화기에 대고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오늘 아버지 수술한 날이잖아요. 아버지 유언한 날. 그 때 아버지 나 장가 안 갔다고 그리도 한스럽게 우셨는데. 아버지! 그 때 저 얼마나 가슴 아팠다고요. 그러니 이제 다시는 저 울게 하지 마세요. 아셨죠? 건강하게 오래 오래 제 곁에 계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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