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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생 관련 사건에 대해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박노빈 현 에버랜드 사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했다. 선고가 내려진 뒤 허태학 전 사장이 법원을 나서고 있다.
4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생 관련 사건에 대해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박노빈 현 에버랜드 사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했다. 선고가 내려진 뒤 허태학 전 사장이 법원을 나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냉정하게 보자. 삼성의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면 꼭 손해를 본 것만도 아니다. 도덕성을 잃었지만 지배구조가 무너지진 않았다. 비유하자면 부상은 입었지만 목숨엔 지장이 없는 셈이다.

삼성 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자녀인 이재용씨 남매들에게 헐값 발행한 데 대해 법원은 유죄 판결을 내렸다. "회사에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한다"는 취지다. 장부상 순자산가치가 주당 22만원, 시세가 8만원에 이르렀는데도 주당 7700원에 발행한 것은 명백한 배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상장 회사의 전환사채 가격을 정확하게 계산할 법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손실액이 얼마인지 계산할 수 없고, 따라서 손실액이 50억원 이상일 때 적용하는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의 배임죄는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 이를 두고 시민단체 등에선 법리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법원은 전환사채 발행에 대해 무효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로써 이재용씨 남매는 삼성에버랜드 주식의 효력을 그대로 유지하게 됐다. 증권거래법상 주식을 무효화할 수 있는 소송 길이 열려있긴 하지만 그 기한은 주식을 발행한 날로부터 6개월 이내다. 하지만 삼성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발행한 시점은 10년 전인 96년이다.

태산명동 서일필

노무현 대통령이 금융산업구조개선법 개정안 성안절차를 강하게 질책하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경위 조사를 지시했지만, 그 결과는 '역시나'였다. 사진은 청와대 전경
노무현 대통령이 금융산업구조개선법 개정안 성안절차를 강하게 질책하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경위 조사를 지시했지만, 그 결과는 '역시나'였다. 사진은 청와대 전경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래서 삼성은 이렇게 말했다. "유죄 판결이 났다 해도 전환사채와 주식 발행 자체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배구조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다."

법이 이러하니 정부가 나설 여지도 없다. 권한만 없는 게 아니라 의지도 없어 보인다.

비록 그 액수는 알 수 없으나 전환사채를 헐값으로 발행한 건 사실이라고 법원이 판결한 만큼 월급쟁이 급여에서 원천징수해가는 그 단호함으로 세무당국이 나설 법도 하지만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국세청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전환사채 헐값 발행이)구체적으로 어떻게 회사와 주주 등에 손실을 주었는지 입증이 돼야"하고 "(전환사채 발행) 당시 과세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소급적용하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어디 국세청 뿐인가.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대통령이 금융산업구조개선법 개정안 성안절차를 강하게 질책하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경위 조사를 지시했지만, 그 결과는 '역시나'였다. "부처간 협의가 미진한 측면이 있지만 문책할 만한 사항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또 청와대는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인정해주고, 삼성카드가 보유한 삼성에버랜드 지분은 처분명령을 내리되 그 시행을 유예해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태산명동 서일필('태산이 떠나갈 듯 했는데, 나온 것은 겨우 쥐 한 마리', 즉 '소문만 떠들썩하고 결과는 보잘것 없다'는 한자성어)'의 뜻이 뭔지를 몸으로 보여준 사례다.

밑져야 집행유예? 무섭지 않은 검찰 수사

지난 5월 고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이건희 삼성회장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식'이 학생들의 시위로 인해 파행으로 치뤄진 가운데, 삼성이 400여억원을 기부해서 지어진 '고대 100주년 삼성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이재용 상무(오른쪽)가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5월 고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이건희 삼성회장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식'이 학생들의 시위로 인해 파행으로 치뤄진 가운데, 삼성이 400여억원을 기부해서 지어진 '고대 100주년 삼성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이재용 상무(오른쪽)가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경영세습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나머지 피고발인 31명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다고 하지만 기대할 바가 못 된다.

법학교수 43명이 고발한 사건을 3년 넘게 끌다가 겨우 실무 임원 두 명을 기소하는 데 그친 검찰의 과거 전력을 문제삼아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검찰의 수사는 배임 행위에 대한 사법처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편법으로 구축된 지배구조를 바로 잡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삼성 총수 일가 또는 계열사 임원들인 피고발인들이 무서워할 것 같지도 한다. 핵심 실무 임원에 대해 업무상 배임죄를 인정하면서도 집행유예형을 선고한 법원의 판결에 미뤄볼 때 '밑져야 집행유예' 정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재벌 3세의 그룹 지배구조가 편법으로 구축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바로잡을 수 없는 법적 현실 앞에서 마지막으로 눈길을 돌릴 곳은 오로지 국민 여론 뿐이다.

미온적인 검찰을 움직여 그나마 '찔끔 기소'라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동력이 국민 여론이었듯, 법적으로 안 되면 정치적 판단으로라도 지배구조 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 동력은 국민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국민 여론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믿음'

물론 정치적 판단의 주체는 이건희 회장이다. 이 회장에게 정치적 판단을 요구할 명분은 법원이 부여했으니 '촉구 행위'가 과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부 언론도 이건희 회장의 '용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여의치 않아 보인다. 애초 소유와 경영을 분리할 내릴 마음이 있었다면 전환사채를 편법으로 발행하고, 금산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삼성에 유리하도록 총력전을 폈을까 하는 의문은 자연스럽다.

상황이 바뀌면서 이건희 회장의 '용단'을 '강제'할 조건이 갖춰지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안기부 X파일에 금산법 개정파문, 삼성자동차 채무변제 시비 등 악재가 겹치면서 코너에 몰린 이건희 회장이 상황 반전 카드를 꺼내 들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같은 '조건 숙성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조건 퇴색론'도 만만치 않다. '소나기는 피해가자'는 심산으로 버티면 된다는 게 '조건 퇴색론'의 핵심이다. X파일과 금산법 파문은 이번 정기국회가 정점이므로 시간을 끌면 퇴색될 것이고, 삼성자동차 채무변제 시비는 LG카드의 전례에서 보듯 적당한 선에서 돈으로 타협을 모색할 수도 있다.

이런 계산법의 밑바탕에는 가장 근본이 되는 판단이 깔려있다. 국민 여론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믿음' 말이다.

"기업활동의 위축을 심화시킬 '운동 차원'의 기업 공격은 자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5일자 <동아일보> 사설.
"기업활동의 위축을 심화시킬 '운동 차원'의 기업 공격은 자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5일자 <동아일보> 사설. ⓒ <동아일보> PDF
그럴 법도 하다. 국민 여론을 이끄는 게 언론인만큼 국민 여론의 강도와 수명은 언론의 태도와 직결된다. 하지만 삼성에 대한 언론의 태도는 미온적인 데서 더 나아가 너그럽기까지 하다. 한 예만 들자.

<동아일보>는 오늘자 사설에서 "삼성이 증여 시비에 묶여 힘을 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 노력을 촉구하면서도 다른 주장을 끼워 넣었다. "이번 판결이 반기업정서와 재벌 때리기를 증폭시키는 재료가 돼서는 안 된다"며 "기업활동의 위축을 심화시킬 '운동 차원'의 기업 공격은 자제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건전성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삼성의 '노력'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먹혀들수록 국민 여론은 퇴색된다. 그만큼 삼성은 힘을 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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