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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호회 모임에 나갔을 때 일이다. 이제 갓 마흔인 내게 다섯 살 많은 선배가 발칙한(?) 질문을 했다.
"야! 지영아! 너 혹시 요즘 책 읽을 때 책 잡은 손 멀리하지 않냐?"
선배는 두 손에 책을 잡은 모양으로 가슴에서 멀리 뻗는 친절한 모션까지 덧붙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아뇨. 근데 그건 왜요?"
"나는 나이 40이 되니까 눈이 침침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나오더라. 너도 이제 슬슬 돋보기를 준비해야 할 거다. 이제 너도 중년 아니냐."
"!"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중년이라니...' 물론 찬란하게 젊은 시절은 갔지만 왠지 중년이란 소리를 듣고 보니 마른 손바닥에 모래가 비벼지는 듯한 이물감이 드는 것이었다. '아직 아이도 어리고 마누라도 청바지 입고 나가면 처녀소리 심심찮게 듣는다고 할 정도인데 내가... 중년이라니...'
나는 느닷없이 내게 얽어진 중년이란 단어를 가슴에 무겁게 얹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자마자 인터넷을 뒤졌다.
중년(中年)[명사] 마흔 살 안팎의 나이
'헉~'사전적 의미로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이었다. 눈이 침침해져도 결코 놀라거나 피하지 못할 나이가 맞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늦은 음주가무가 시름해지기는 했었다. 멀리 나가 바깥 잠이라도 잘 적엔 마누라 있고 아들이 있는 방안 풍경이 몹시 그리워지기도 했다. 친구 녀석이 술 한 잔 하자고 하면 대뜸 그러자고 한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고, 가슴 크고 얼굴 예쁜 여자를 보며 괜한 상상에 젖었던 시절이 아련하더니만 바쁜 일상에 묻혀 결국은 슬금슬금 중년의 문턱에 덜컥 와 버린 것이었다.
불혹(不惑)에 찾아드는 세 가지 절망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매주 한 번 정도는 만나 술 한 잔 씩은 나누었던 절친한 선배의 말이 이랬다.
"지영아. 남자 나이 사십이면 세 가지 절망에 빠지게 돼있다. 첫째는, 건강에 대한 절망이고 둘째는 경제에 대한 절망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랑에 대한 절망이다."
이제 곧 사십인 내가 귀를 쫑긋하지 않을 수 없게 선배의 표정은 비감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사십을 전후로 많은 사람들이 금연하고, 없는 자존심 바닥까지 드러내며 비굴하게 회사에 붙어 있지만 그 마지막, 사랑에 대한 절망은 말이다. 더 이상 나를 가슴 설레게 하는 로맨스는 있을 수 없다는 아주 절망적인 사실을 인식한다는 거지."
선배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중년들에게서 불륜이 많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사실인식에 저항하는 마지막 발악이라고 보면 되는 거야.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절박한 심정인 것이지."
선배의 말이 끝나고 나는 상당히 동의한다는 뜻으로 움켜쥔 소주잔을 단 번에 비워버렸지만 송연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이 사십에 던져지는 불혹(不惑)이라는 말이 세상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일 테지만 어쩌면 그만큼 유혹이 많은 나이 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건강에 대한 절망과 경제에 대한 절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절망 중에서 지금껏 내가 가지고 있는 절망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제 갓 사십이어서인지 아직 절망이라는 단어는 익숙하지 않다. 다만 나를 관통해온 삼십대 시절에 가졌었던 감성의 고점들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들은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부양해야 할 가족들 생각에 아직껏 내 인생에 대한 예우는 한 쪽으로 밀려나 있었다는 아쉬움이 다시 밀려왔다.
이제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씩 들려오는 친구들의 부음을 받으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닌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망자의 아이가 몇 살인지, 부인이 직장은 다니는지, 재산은 얼마나 남겨 놓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앞서는 건 죽은 사람의 마른입 보다는 산 사람들의 눈물겨운 삶 때문일 것이다(진심으로 건강해야겠다).
신입사원들의 주민등록번호가 8자로 시작된다는 사실 앞에서 나에게 남아있는 경제 연령을 역산해 보는 뒷맛은 또 얼마나 씁쓸한 것인지. 큰 아이가 대학에 입학할 때쯤엔 내 나이가 어느 정도에 맞춰질지 계산해 보고는 등허리에 섬뜩한 찬바람을 느끼는 맛은 또 어떻고.
하지만, 불혹이라는 게 상념에만 빠지게 하는 무기력한 단어는 아닌 법. 잠시 나의 지나간 날을 돌이켜본다. 밤늦은 시간 회사 일에 치여 지친 모습으로 집에 들어와서는 혼곤히 잠들어 있는 가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고 가슴 뿌듯했던 그 시절.
내가 언젠가 건강, 경제 혹은 사랑에 절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언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행복하기 위해 산다. 나이 사십을 넘어서며 가지는 사회적 유통기한에 대한 중압감들이나 가족들의 미래를 완전히 담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괴감들이 그에 걸맞은 책임감으로 환치되어지는 것은 가족들이 주는 행복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아닐까. 바야흐로 나는 중년인 것이 맞지만 아직 절망할 여유는 없는 것이다.
'경제에 충만하고자 다른 모든 것을 소진시켜버린 나의 30대에 대하여 경의를 표함과 아울러 나의 살아갈 날이 더 많은지 혹은 살아온 날이 더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이 충만할 수 있도록 이제 시작 된 중년을 채워나가리라(아멘).'
삼각대 위 네모난 뷰파인더 안에 계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속절없이 떨어진 색 바랜 밤송이들 사이로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웃음 짓는 모습이 비쳐진다. 아내와 아들 사이로 내가서야 할 곳을 찾아 뷰파인더를 다시 조정한 후 타임버튼을 누르고 재빠르게 뛰어와 아내와 아들 옆에 섰다. 찰칵!
다시 돌아와 본 LCD 화면 속에 활짝 웃는 가족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