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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나의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려고 애써 보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시간을 잃어버리기나 한 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기억의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일까?

<프루스트 클럽>은 성인이 되어 제법 어려운 책들께나 읽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가볍게 보이는 책이다. 내게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의 깊이만큼은 절대로 가볍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성숙된 인격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과거 아픈 추억 몇 개 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대개 그 흉터를 애써 부인하고 감추고, 자신의 인생의 퍼즐로부터 떼어내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다보면 내 인생의 퍼즐 조각 몇 개가 사라져버리게 되고 결국 인생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프루스트 클럽>의 주인공들(윤오, 나원, 효은)은 우리의 어린 시절의 한 조각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고 사는 아이들이다. 우리와 같이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잃어버린(아니 감춰버린) 자신의 흉터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린 아이들의 마음속에 상처를 입히는 모래 알갱이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학교 선생님으로서 공부만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윤오의 어머니, 효은이가 애써 모범생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게 만든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효은이의 어머니, 그리고 자녀 교육에 방관자로서 살아가는 나원이의 부모. 이들과 현대 사회는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에게 원치 않는 흉터를 남긴다.

그러나 진주조개가 그렇듯이 우리의 아이들은 상처를 입고서도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모색한다. <프루스트 클럽>에서 윤오와 나원, 효은은 저마다 가슴 속에 흉진 상처를 싸매고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작가가 아이들의 상처 치유의 길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있는 것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작가 자신이 성장기에 경험했던 상처를 치유하는데 있어서 그 소설이 주는 특별한 영향력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다 알 듯이 프루스트의 소설은 쉬운 책이 아니다.

15년에 걸쳐서 완성된 소설인 만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매우 수준 높은 책이다. 중학교 학생들이 이해할만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 역시 그만큼 힘든 과정이 아닐까? 어차피 인간은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운명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프루스트의 글을 읽어가면서 인생의 의미를 하나씩 찾아간다는 그 발상 자체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이 난해한 소설을 읽는 모임을 가지면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마음의 상처를 하나씩 치료받기 시작한다. 특별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간판을 단 카페의 여주인 오데뜨(프루스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딴 주인의 별칭)는 저들의 삶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날마다 하늘이 맑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니? 아마 지금쯤 모두 다 사막이 되었을 거야…. 상처 받는 걸 두려워하지마…. 만일 상처를 받았다면, 지워질 것 같지 않다면 아름다운 흉터를 만들도록 해. 그럴 수 있어…. 그러길 바라."

오데뜨의 이 말은 주문처럼 아이들의 마음속에 박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윤오는 자신이 이전 학교에서 상처를 입힌 친구를 찾아가 '미안하다' 말하게 되고, 나원이는 삼촌과의 화해로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효은은? 효은은 어느 날 갑자기 자살하게 된다. 공부도 잘하고, 대인관계도 좋고,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효은은 자신의 상처를 끝내 치료하지 못한 채 자살을 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작가는 그 효은이의 자살이 상처를 싸매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 걸까... 그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건 어쩜 우리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소설의 이야기는 아이들이 <프루스트 클럽>의 카페에서 퍼즐을 맞추는 것으로 오버랩된다. 고흐의 그림이 그려진 퍼즐을 맞추는 아이들! 아마 작가는 고흐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하게 된 것은 나 역시 고흐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맞추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은 아마도 저들의 기억의 상처일 것이다. 그 상처를 치유하고 아름다운 흉터로 만들 수 있을 때, 그 때 저들은 비로소 퍼즐을 완성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생각해 보았다. 성인으로서 난 나의 인생의 퍼즐을 완성했는가? 돌이켜보니 여기 저기 아직 채우지 못한 조각들이 너무도 많다. 우린 사실 우리의 인생의 상처들을 아름다운 흉터로 만드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여기 저기 아직 다 채우지 못한 퍼즐의 공간들이 흉측하게 남아있지 않은가.

작가는 우리에게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주려고 애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우연히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애써 우리의 시간들을 잊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여전히 소중하다면 다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잃어버린 젊은 시절들을 다시 찾을 수 없다면 우리의 아이들의 삶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오늘도 무언 가에 상처를 입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아이들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아니 혹시 상처를 받았다면 그 상처를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아름다운 흉터를 만들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감싸야겠다.

작가의 교훈이 여기에까지 미친다. 김유정의 <동백꽃>이래 계속된 한국의 성장소설의 계보가 오늘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서 더욱 더 감성적으로 꽃피는 거 같아서 이 소설이 더욱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프루스트 클럽

김혜진 지음, 바람의아이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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