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성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 여성으로서 ‘미친년’이라는 섬뜩한 단어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회와 광녀의 혈연관계를 직시하고 자기 자리를 자신이 정함으로써 그 순환고리를 끊어 내야 하지 않겠는가. ‘1세대 페미니스트 사진작가’ 박영숙(64)씨가 7년째 ‘미친년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다.
1999년 '싫어 안돼', 2001년 '난 잘 몰랐어요', 2002년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 그리고 '2003년 화폐개혁 프로젝트'에 이어 지난 6~7월 '미친년 프로젝트 2005' 전시회로 7년 연작의 한 매듭을 지은 박영숙씨. 5녀 3남 중 맏딸로, 유복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어떤 억압도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차별 모르고 살던 중에는, 페미니스트의 ‘페’자도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그가 학교 문 밖을 벗어나 사진을 하면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닥치지 않아도 될 무수한 벽들을 얼마나 많이 맞닥뜨렸겠는가 짐작이 안 가면 이상하다.
전시회 마지막 날 오전 10시,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 도심 한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식물성 공기, 초여름 빗소리도 흠집 내지 못하는 고요 속에 ‘미친년 프로젝트 2005’ 전시회가 이른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 ‘내 안의 마녀’, ‘꽃이 그녀를 흔들다’는 세 가지 테마에 맞춰 층별로 전시된 사진 속 여성들은, 6월 10일부터 시작된 마라톤 전시에도 지친 기색 없이, 성차별적 현실의 광기를 온몸으로 되쏘아 내고 있었다.
막 문을 연 시각이었는데, 평생 ‘미친년’ 소리는 들어볼 성싶지 않은 우아하고 청초한 여대생 몇몇이 그 눈빛을 해독하고야 말겠다는 듯 사진 속의 나이든 여성들과 눈을 맞추었다. 액자 앞에 선 여자들과 액자 속의 여자들은 ‘변신 전’ ‘변신 후’를 대조하는 한쌍의 광고사진 같았다. 아마도 현실이 좀더 빠른 속도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몇 십년 후 이 여대생들도 저 사진 속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을 털어내는 순간, 우비에 묻은 빗물을 털며 박영숙씨가 전시장에 들어선다.
“사진이 너무 생생해요. 아무 설명 없어도 저 여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 것 같아요.”
소감부터 말했더니, 여성들은 다 비슷한 반응이란다. 이어 빗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관내 찻집으로 자리를 옮긴 박영숙씨에게 지금의 그를 형성한 몇 가지 요소들을 회고록 술회하듯 들려 달라고 졸랐다. 여기 옮긴다.
1. 아버지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세상 어느 선비 못지않은 지성인이시던 아버지는 내 삶의 멘토였다.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벌 만큼 버셨지만 여덟 자식의 교육비로 쓰신 이외에 부동산 투기를 한다거나 다른 형태로 축적하지는 않으셨다. 당신 자신이, 늘 독학으로 무엇인가를 익히고 배우셨다. 돌이켜보면 토목업을 하신 그분의 머릿속에는 ‘바우하우스 ’독일의 건축 예술 전문학교 의 개념이 완벽하게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가르쳐주신 것도 아버지였고, 당신의 소중한 물건들을 자식들의 장난감으로 선뜻 내주신 것도 아버지였다. 시계든 라디오든 카메라든 비싸고 귀한 거라고 감추고 아끼는 대신, 자식들에게 직접 만지고 써보게 하셨다. “앉아서 궁금해하지 말고 직접 거기 가보라”고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은 지금도 내 귀에 박혀 있다. 난 라디오를 뜯어 조립하던 남동생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며, 나 자신, 아버지의 카메라를 들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2. 카메라
토목업에 사용되던 자신의 도구와 기계들을 놀잇감으로 아낌없이 내주시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기계와 친했다. 기계가 아니라 내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훗날 처음 운전을 했을 때 시동이 걸리는 순간 내 심장이 부르릉 떨리는 걸 느낄 정도로. 그래서 사진을 가르칠 때도 안구를 통째로 교탁 위에 놓고 눈의 구조를 가르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망막의 구조는 어떻고 거기로 빛이 어떻게 들어와서… 등등 이런 개념은 내게는 너무 쉬웠다. 무서운 기계, 거부하고 싶은 기계가 아니라 내 머리의 연장, 손의 연장, 나의 연장이었다.
3. 인문학적 교양
실수로 사학과를 간 것은 결과적으로 새옹지마가 되었다. 1차에 떨어지고 숙명여대에서 2차로 특수과 학생을 선발했는데, 남들이 다 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상과’를 택했다. 그런데 원서를 대신 접수한 친구의 실수로 사학과로 가게 된 것이다. 1학년 한 해 동안 좋은 성적을 올려 더 좋은 과로 옮기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사학개론이 굉장히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곧이어 토인비의 사관을 접하게 되었다. 역사와 현실의 인과관계를 배웠고,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면서 내 삶의 방향에 대해 주체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역사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소설은 싫어하고 논리적인 이론서를 좋아한다. 나중에 페미니즘 미술운동에 본격 가담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과 모더니즘, 광기, 섹슈얼리티를 비롯한 여러 주제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런 사고체계의 기본이 사학공부를 통해서 형성됐다고 생각한다.
4. 사진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가 찍어 오신 토목공사 현장사진을 요리조리 잘라 붙여 탐색하고 느낌을 따져보고 했었다. 사진을 공부하고 싶다는 욕구가 굉장해서 신문 보면 ‘사진’이라는 활자만 찾아 헤맬 정도였다. 그때 이후로 내가 사진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단 1초도 해본적 없다.
당시 공보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문화공간이 흔치 않던 시절에 대학생들에게는 숨통을 틔워주는, 학생들의 문화를 리드하는 곳이었다. 난 학교가 파하면 집으로 가지 않고 그곳으로 가서 문학관 미술관 음악관 등을 순례하곤 했었다. 어느날 총학생회에서 친구하고 말다툼하던 끝에 휙 공보관으로 달려갔는데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흑백의 모던한 사진들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거기 계신 분들께 사진공부하고 싶다고 졸랐고, 나중에 한국현대사진사를 이끈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게 됐으며 본격적으로 사진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5. 숙미회
졸업반 때인 1963년, 숙명여대 사진동아리 ‘숙미회’를 조직했다. 그 전해에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소위 ‘자금의 흐름’을 알게 된 것이 그 기반이 됐다. 지금 43회인가가 활동하고 있는 그 동아리에 대한 애착이 커서, 신입생은 꼭 내가 트레이닝시켰고, 졸업하고 난 뒤에도 아주 오래 뒤까지 내가 직접 후배들을 가르치고 감싸안고 살았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의 사업 실패로 매우 어려웠을 때, “자살하고 싶어도 숙미회 후배들 때문에 자살 못한다, 누가 그 일을 감당하랴” 그럴 정도였다.
6. 결혼
친구 소개로 만난 사람과 스물일곱 살 나던 해 결혼했다. 당시에는 제일 늦은 나이였다. 여자형제 다섯 중의 맏딸로 내가 순조롭게 결혼해야 동생들도 순조롭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늘 듣고 살아서 그게 억압이 되었다. 책임감이 있어서 어떻게든 시집은 가서 돌파구를 만들어 내야겠다 싶었다. 내심 빨리 결혼해서 어떻게 정리해 버리고 혼자되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남자들도 있었는데, 아마 내 욕망대로 살지 못하게 할 거라고 미리 짐작했던 것 같다.
속박이 싫었다. 나는 돈이 많거나 존경스러운 남자보다는 내 일에 방해가 안 되는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생각했다. 선보러 나가서도 늘 난 사진해야 된다고, 조건을 걸었다. 작가가 돼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한번은 패티 김이 위키 리를 비롯한 네 명의 남자와 공연하는 리사이틀을 보러 갔다. 그때 내가 저기 로열 박스에 있을 것이냐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것이냐, 즉 아티스트를 돈 주고 사는 사람이 될 것이냐 아티스트가 될 것이냐, 귀부인이 될 것이냐 아티스트가 될 것이냐고 자문해 보았다. 죽어도 로열 박스에 앉는 사람은 안 될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런 점에서는 성공했다.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고생하는 건 무섭지 않았다. 살면서 결혼이 여자를 참 힘들게 한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후배들한테도 결혼은 한번 해보라고 말한다. 안 해 보면 바보가 된다고. 자식이라는, 끊어지지 않는 절대적 인연, 그걸 한번 통과해 보는 게 인생의 맛 아닌가.
7. 페미니즘
난 카메라가 남자의 기계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세상은 이상하게도 사진은 남자의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 화가 났다.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나만큼 완벽하게 아는 사람이 누가 있나 하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전혀 콤플렉스가 없었는데 사회가 나를 차등하니까, 내가 여자라는 이유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저널리즘에 매력을 느껴서 신문잡지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거절당했고, 활동하던 모임에서도 안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밖에 나오면 남성 멤버들보다 하류 취급을 당했다. 2년간 일했던 '여상' 잡지에서도 남성 선배와의 의견충돌로 직장을 떠나야 했다. 그 뒤 평생의 벗인 화가 윤석남과의 만남과 공동작업, 1975년 ‘유엔 여성의 해’ 프로젝트 참여, ‘또 하나의 문화’ 활동, 유방암 수술 등으로 이어지면서 성차별적 현실과 양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고, 1999년 여성문화예술기획이 개최한 여성미술대전 ‘팥쥐들의 행진’에서 처음으로 ‘미친년 프로젝트’ 연작을 시작하면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의식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성곡미술관이 이번 전시회를 받아들인 것은, 어떻게 보면 획기적인 일이다. 주류 매체에서도 ‘미친년’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어감 때문에 소극적으로 보도할 정도인데,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 당장 여기 전시된 41점의 사진을 어디에 보관할 것인가도 문제다. 이런 사진을 자기 집에 걸어 두려는 사람은 아직 없다. 여성 관련 정부부처나 유관단체에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건 곧, 내 작업이 아직도 한참 더 계속돼야 한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성곡미술관에 내걸린 41점의 사진을 끝으로, 세상의 미친년들 초상 수거작업이 완료된 것은 아니다. 그가 담고 싶었던 이미지중에서, 한쪽으로 밀려가는 군중을 헤치고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가는 ‘미친년’을 비롯해, 영화촬영만큼 지원이 필요한 몇몇 ‘스펙터클’은 아이콘화 작업을 아쉽게 뒤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나서 지금 그의 머리를 새로 채우고 있는 것은 ‘귀신’과 ‘치매’이다. 한을 품고 ‘볼 일’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귀신들, 여성 치매환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몇몇 특정한 행태들도 결국은 ‘미침’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의상과 분장, 세트 등 대규모 자본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난관이,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데뷔전’을 치렀다고 말하는 그에게 오래 걸림돌로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찰칵’ 소리에 최면이 걸리고 이어지는 ‘찰칵’ 소리에 오르가슴을 느낀다는 이 여성은, 아마 얼마 되지 않아 아마추어 모델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 놓고 “넌 소년과부야. 배꽃이 하얗게 피었네. 새벽인데 넌 배밭을 헤매고 있어. 왜지? 그래, 바로 그거야, 와우, 너무 좋아!” 외치면서, 아무도 그 값을 물어보거나 지불하지 않는 비싼 필름을 한번에 일곱 롤씩 써가며, 그녀들 속에 있는 ‘미친년’을 끌어내서 상처를 치유해 주고 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