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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세상
<한겨레>에 실리는 정혜신 칼럼을 즐겨 읽는다. 색다르기 때문이다. 대개 칼럼니스트는 문제를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구조진단을 통해 처방을 내리거나 급소를 공략해 독자를 설복시키려 한다.

그런데 이 칼럼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대고 속삭인다. 탄핵가결을 보고 당신들은 ‘미쳤다’고 선언하고, X파일 문제 해법으로 검사들에게 직업 '본능'에 충실할 것을 주문하는 식이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인터뷰도 그랬다. 국보법 폐지 운동에 법리 논쟁만 남고 '사람'이 빠져있다고 안타까워하며, 법에 짓밟힌 사람이 겪는 ‘마음’을 들여다보자고 말한다.

또 있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를 다루는 심포지엄으로 국제관계 역학 분석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평가가 주를 이루는 자리로 기억된다. 사회학자 조은 교수는 피해자의 '기억'을 매개로 분단체제의 아픔을 설명했다. 가장 큰 희생자가 제일 많이 기억하고, 가장 오래 침묵하며, 그로 인해 최후에 발언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사회과학 영역으로 옮아가면 내면을 파헤치는 시도는 더 줄어드는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보기 드문 통찰력이다.

파시즘,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다

이렇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미시적 시각을 다시 만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역사적 파시즘 제국의 판타지와 젠더정치> 역시 내면을 파고든다. 우직하게 인간의 심리를 파헤쳐 파시즘과 자본주의체제가 닮아있다고 말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파시즘을 집단주의적 경향으로 이해해서 '구조'에 초점을 맞추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분석이다.

그러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주체들의 '내적요인'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극심한 경쟁체제, 증오심, 박탈된 자의 원한 같은 복잡한 심리에 착안해 내리는 결론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고 남을 딛고 위로 올라서려는 욕망을 들춰내보면 서로가 유사하다는 주장이 공허하지 않다.

"결국 파시즘체제에서 이탈하거나, 저항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것은 이처럼 욕망의 문제와 경쟁의 논리, 제도화의 그물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입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면 그가 느끼는 두려움 역시 비슷하리라. 욕망을 억눌러야 하고 경쟁에서 낙오된 자로 낙인찍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재야에 남아 '조직의 쓴 맛'을 봐야하는 처지까지 닮은 모습이다.

파시즘을 집단주의의 광기가 지배하는 '집단화'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깃털처럼 가볍게 다가오는 것이다.

"모두가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고립감, 미래에 대한 불안감,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막막함에 사로잡혀 있다는 상황"이 집단주의로 채색된 파시즘의 내면이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글쓴이처럼 연대가능성의 파괴와 개인의 고립화를 파시즘의 알맹이로 본다면 오늘날 파시즘 부활을 경계하는데 훨씬 유용할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저자의 시각에 걸맞게 다루는 소재 또한 거시적인 '제도'가 아니다.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신문과 잡지 광고 등 미시적인 자료가 주요 텍스트다. 거기에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욕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남성에 머문 시선을 여성으로 끌어내다.

파시즘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기존 이미지는 '남성적'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남성화된 이미지는 편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여성에게도 파시즘체제를 유지ㆍ강화시키는 역할이 부여됐다는 점을 새롭게 논증한다. 일제시대 여성의 삶을 다루는 시각이 주로 위안부 문제를 조명하는데 그치는 것에 비춰볼 때 무척 진일보한 접근이다.

조선은 태평양 전쟁에서 후방이었다. 저자는 이런 후방을 관리하는 역할이 여성에게 강제된 사실을 보여준다. 남성이 전장에 동원된 상황에서 전시동원에 기초단위인 가정을 지키는 여성의 모습을 이른바 '총후부인'(총 뒤의 부인)담론으로 설명한다.

'군국의 어머니'담론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남편과 아들이 전장에서 싸우다 죽지만 '어머니'는 의연하게 가족의 생계와 가문을 이어간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는 것을 파시즘 체제가 여성의 모델을 포착하는 단초로 그려낸다.

여성에 대한 이런 관점은 '신여성'을 비판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가정을 수호하는데 부적합한 자유주의적인 여성 정체성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당시 담론 체계를 보면 상당히 주도면밀하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개인주의적 신여성을 단죄하기 위한 '여자 스파이'담론은 흥미롭기도 하다. '스커트 밑에 총을 감춘 여 스파이' 또는 '그대 곁에 스파이가 있다'는 식의 언론논평은 신여성에 대한 거부감을 부추기며 동시에 일반인의 관심도 끌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우리는 일제말기 욕망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저자가 제시하는 화두인 '남방종족지'담론은 엉뚱하게도 오늘날 국제정세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떠올리게 했다. 이는 1938년을 전후해 조선에서 급증한 담론체계인데, 조선인들은 태평양 전쟁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남태평양인들보다 스스로 우월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일본제국 내에서 일본인에 이어 2인자 지위를 점하려는 '제국의 판타지'를 내면화했다는 설정이다.

이는 종족지(ethnography)와 문화 등을 통해 남방인을 미개한 야만인, 야자수 그늘 아래의 '깜둥이'로 이미지화함으로써 구체화된다. 대동아공영권 내의 다른 식민지와의 관계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불안감은 결국 일제체제에 더 잘 적응해 그 안에서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욕구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안타까운 욕망의 굴절이다.

이 책은 만주사변에서 태평양 전쟁에 이르는 일제말기(1930~1945)의 특성을 파시즘과 젠더 정치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암흑기라고 부르는 시기다. 체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암흑기는 매우 특수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와 욕망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오늘날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괜한 의심으로 끝나는 것이 좋을 섬뜩한 의문이다.

덧붙이는 글 | 권명아 지음/책세상 펴냄


역사적 파시즘 - 제국의 판타지와 젠더 정치

권명아 지음, 책세상(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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